7: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7: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7:13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7: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7: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7: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7: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7: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7: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7: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7: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7: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7: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7: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
8: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8: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8: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8:4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8: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8: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8: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8: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8: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8:11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8: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8:13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8:14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8: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8: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8: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8: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8: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8: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8: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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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부터 이어지는 홍수 이야기에서 전하는 홍수의 원인과 결과,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림 감상하기
- 두 그림을 보면서 제각각 어떤 느낌이 드나요?
- 두 그림은 무엇을 중심으로 구도를 잡았다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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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 사회에서 폭우와 홍수는 인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나서 두려움과 놀라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고대신화에서도 홍수 이야기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고대 근동의 홍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전해오는 길가메쉬 서사시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서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비슷한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이야기 모두 신(들)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지만, 선택받은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이 배를 지어 몇몇 동물들과 함께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 이야기 모두 홍수가 끝났는지의 여부를 새로 시험한다고 전하며, 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물론 이 세 이야기의 차이점도 연관성만큼 뚜렷합니다. 우선 주인공의 이름이 다릅니다. 길가메쉬 이야기에서는 우트나피슈팀, 아트라하시스 이야기에서는 아트라하시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노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홍수의 원인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의 죄를 이유로 드는 반면, 길가메쉬 이야기는 침묵하며 아트라하시스는 인간들이 내는 소음이 신들의 휴식을 방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웁니다. 더욱 분명한 차이점은 홍수의 결과에 대한 서술입니다. 길가메쉬 이야기에서는 최고신 엔릴이 인류를 멸하려는 계획으로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아내에게 영생을 수여합니다. 곧 신이 되게 하여서 인간의 씨를 말리려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트라하시스 이야기에서도 인간의 소움을 줄이는 방법으로 증가를 막는 묘책이 나오는데, 이를 위해 신들은 불임 여인을 만들고,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죽이는 악귀를 만듭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고 복을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구약성경의 이야기는 다른 두 이야기의 인본주의를 철저히 베제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복주심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원역사의 전체 맥락 안에서 홍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에 홍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의 시도라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구약성경은 창세기 6:5~7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홍수를 이야기합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6:5~7) |
그리하여 6:11에서는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땅이 모두 썩어버렸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극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런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자연현상, 곧 홍수(맙불(히))로 드러납니다. 홍수를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맙불"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창6~9장)와 시편 29:10에서만 쓰입니다. 그래서 이 낱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흐르다"는 뜻의 동사 "야발(히)에서 와서 창세기의 세계관에 따라 하늘 위의 물을 뜻하고, 그것이 쏟아지는 현상을 일컫는다고 추측할 뿐입니다.(창4~11, 창1~15) 이렇게 볼 때, 홍수는 창조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창세기 1:6에서 하나님은 굳은 하늘벽을 뜻하는 궁창(라키아(히))을 만들어 하늘 위의 물과 그 아래 물로 나누셨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맙불"은 그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 전에 무엇을 하셨나요? 창세기 1:3~5에서 하나님은 첫 창조 사역으로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홍수는 읽는 이에게 하나님의 첫 피조물인 빛의 존재까지 치고 올라가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그 빛마저 없다면 무엇인가요? 홍수의 심판은 하나님과 단절된 극단의 상황까지 생가하게 합니다. 이렇듯 성경의 홍수 이야기는 죄가 낳는 무서운 결과를 매우 회화적으로 그려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엄중한 심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서 노아라는 "의롭고 흠 없는"(타밈 차디크,6:9)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이것이 사실은 홍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여느 이야기와 차별되는 점이며, 이 이야기 자체의 목적입니다.
본문을 이렇게 읽고 보면,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가 노아의 홍수를 주제로 그린 두 작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터너(1775~1851)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가답게 풍경을 통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기에 거친 바다가 적합해 보였던지, 일생 동안 그는 포효하는 바다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낭만주의자로서 터너가 그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492~494) 그리고 그는 종종 이른바 "소용돌이 구도"에 풍경을 배치하곤 하였습니다.(파이퍼, <미술사의 이해3>, 536) 격정적인 자연의 몸부림 가운데 소실점 구실을 하는 빛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휘도는 형태의 그림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과 관련하여, 터너는 1843년에 "그림자와 어둠: 대홍수의 저녁"이라는 작품과 흥미롭게도 "괴테의 이름"이라는 부제가 달린 "빛과 색: 대홍수 이후의 아침"이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쓰인 부제 "괴테의 이론"이 터너가 즐겨 쓰던 소용돌이 구도와 빛을 중심으로 대비되는 색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는 괴테가 1810년에 출간한 <색채론>이라는 책에서 터너가 영감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괴테의 색채론은 한 마디로 근원현상으로서 빛에서부터 양극단을 이루는 색채들이 빛과 어둠의 우세도에 따라 나뉜다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한 색채론의 양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Plus | Minus |
노랑 능동 빛 밝음 힘 따뜻함 가까움 밀어냄, 거부 산과 친화성 |
파랑 수동 그림자 어둠 약함 차가움 멂, 거리 잡아당김 염기와 친화성 |
이 관점에서 위에서 말한 터너의 두 작품을 감상해 봅니다. 먼저 괴테의 마이너스 편에 있는 개념을 제목으로 쓴 "그림자와 어둠: 대홍수의 저녁"을 보세요. 여기서 터너는 이제 막 홍수가 시작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어둠과 그늘의 불길함은 파랑색을 바탕으로 한 어두운 색상과 까마귀 떼로 표현하였습니다. 홍수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은 이 어두운 색조 사이사이에 어렴풋이 보일 뿐 이 소용돌이 구도의 그림에서 핵심은 가운데 있는 빛입니다. 괴테의 이론처럼 어둠을 이 빛이 잡아당겨 온 세상을 뒤덮게 하고 있다는 역동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터너의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이키는 심판이라는 점을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 아니듯, 터너도 "빛과 색(괴테의 이론) : 대홍수 이후의 아침 - 창세기를 쓰는 모세"에서 홍수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터너는 흥미롭게도 홍수가 끝난 뒤 노아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면(창 9:1~17)과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오경의 주인공 모세를 중첩한 장면을 그렸습니다. 괴테의 분류대로 빛을 내뿜는 밝음의 색인 노랑을 주로 쓰고 있습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모세 뒤에서부터 시작한 강렬한 빛은 소용돌이치며 바깥으로 어둠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모세의 인도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강렬한 빛에 흐릿하게 비칠 뿐입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홍수 이야기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색상과 구도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가운데 있는 물체입니다. 이 물체는 모세 이야기를 바탕으로 보자면 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흩뿌려져 나오는 빛과 대비되는 이 물체는 그림에서 모세보다 더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뱀이라면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 하나님께 불평하자 불뱀이 나와 그들을 물었는데, 이때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고 이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했고(민21:4~9) 믿음으로 그것을 쳐다본 자는 모두 치료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습니다.(요3:14~16) 터너는 홍수 이야기에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 이야기를 언급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가시화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홍수 이야기를 보면서 빛과 같이 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 의지, 하나님의 복주심과 약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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