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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가인과 아벨(창4:1~16)

by 비앤피 2021.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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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16)

성경 본문 새기기

- 가인의 제사가 거부된 이유를 무엇으로 알고 있나요?

-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그림 감상하기

에밀 놀데, "논쟁(가인과 아벨)", 연대 미상, 종이에 수채, 23.4x18cm, 독일 노이키르헨 제뷜 놀데 재단

- 이 그림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읽는다면 어떤 점을 강조해 볼 수 있을까요?

- 세 인물을 설정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미술작품에서 성경 본문 읽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습니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느낄 수 없지만, 아담과 하와가 낳은 이 두 아들은 이름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감돕니다. 먼저 형의 이름을 보겠습니다. 무론, "카인"이라는 이름은 하와가 그를 낳으면서 한 말 "야훼(의 도움)와 더불어 내가 사람을 얻었다"(창4:1)는 이 이름의 어원을 해석하려는 시도라 여길 수 있습니다. 곧 여기서 "얻다"는 뜻으로 쓰인 동사 "카나"와 "카인"을 언어유희로 연관 지으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주석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이름에서 "창"이라는 명사를 읽어낼 수 있고, 그에 따라 이 이름을 "대장장이"의 조상을 일컫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음 본문만 본다면, 이 세 자음을 쓰는 동사도 함께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동사의 뜻은 "슬피 울다"는 뜻입니다. 특히 죽음을 애도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이름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무리한 일일까요? 동생의 이름은 어떤가요. 동생의 이름 "헤벨"을 발음하는 이라면 "한숨" 또는 "허무"를 떠올릴 겁니다.(전1:2, 시144:4, 욥7:16) 아벨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기에 이름에서 허무를 먼저 느껴야 할까요. 이렇게 보면 두 이름 모두 이들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듯 우울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시작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동생 아벨은 유목민(로에 촌(히))이었고, 형 가인은 농사꾼(오벳 아다마(히))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 둘은 야훼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벨이 드린 제물 양은 야훼께서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곡식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성경 본문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슬프게도 인류의 첫 살인 이야기로 치닫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겁니다.

많은 이들에게 수수께끼가 된 이 사건은 여러 해석을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유목민을 농사꾼보다 더 좋아하신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창세기 2:15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라고 맡기신 것을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둘째, 곡식 제물보다 동물 제물이 더 선호되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레위기에서 동물 제사뿐 아니라, 곡식 제사 규정도 함께 나오니 이와 맞지 않습니다. 셋째, 가인은 곡식의 일부만 골라 드렸고, 아벨은 맏물을 드렸다는 본문을 확대해석하여, 예배 태도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이렇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입니다. 넷째, 왜 하나님께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는 하나님 선택의 신비에 속한다는 주장입니다. 히브리서 11:4을 바탕으로 하나님만 아시는 두 형제의 동기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 가운데 어느 것이 해답일지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원인을 찾아가려는 것이 본문 이해의 핵심일까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는 어느 하나에 더 큰 가치를 둘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은 삶에 드러난 현상이요 사건입니다. 그 원인은 위의 마지막 견해처럼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맡겨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현상을 통해 가인을 훈육하고자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가인의 반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5절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가인은 분통을 터트립니다. 이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감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표현은 살기로 이어지는 전조로 나오기도 합니다.(창34:7, 삼상18:8, 느4:1, 등) 가인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궁극적으로는 동생의 제물만 받으신 하나님이지만, 눈에 보이기에는 그런 제물을 드린 동생입니다. 하나님께 화를 풀 수 없는 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동생을 처치하는 길밖에 없어 보였던 것 아닌가요.

둘째, 가인은 얼굴을 떨어뜨립니다. 이 표현은 7절에서 "낯을 들다"와 대조를 이루는 표현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관계 단절에 대한 의지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렘3:12) 하나님과 동생과 부모님과의 모든 관계는 이 순간 단절되고 이제는 분노를 해결하려는 충동만 남게 됩니다.

가인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것은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바깥으로 돌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인의 눈으로 보면, 지금 맞닥뜨린 현상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부당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말씀하시듯 가인이 스스로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들여다보길 원하셨을 겁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이 말은 제사 드리기 이전에 가인이 했던 행동이 아니라, 제사 드린 뒤 가인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가인은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를 씁니다. 문제의 원인을 우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분노를 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분노는 동생을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요. 우리 삶 가운데서도 이런 부당해 보이고, 불합리해 보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를 먼저 향하는가요.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나요. 아니면 문제의 원인을 바깥으로 돌리고 나를 방어하고 합리화하기에 급급한가요. 후자의 경우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깨버리는 꼴입니다. 가인 이야기는 이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문의 핵심은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의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보고 나면, 표현주의 화풍의 독일 화가 에밀 놀데(1867~1956)가 그린 "논쟁(가인과 아벨)"은 우리가 읽어낸 본문의 의미를 새기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사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제목이나 연대도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지만, 본문을 읽고 새기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발달한 표현주의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상주의와 견줄 수 있습니다. 마네, 모네, 드가, 등을 중심으로 발전한 인상주의 화풍에서는 빛을 받은 사물의 다양한 변화나 놓치기 쉬운 순간의 포착에 집중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외부 사물에서 받은 인상을 재현하려 하였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둡니다. 뭉크의 "절규"와 같은 그림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 표현주의 화가들은 내면에서 꿈틀거리며 분열해가는 의식의 흐름을 분출하여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인간 내면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뭉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경의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그림을 남긴 놀데의 작품은 우리가 읽은 본문 이해를 더 선명하고 폭넓게 표현해 줍니다. 놀데는 자신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반짝이는 순간, 주변의 여건이 맞아떨어지면 그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

놀데는 성경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감정의 불꽃을 찾아내 표현의 길을 열어주어 작품으로 구성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의 주장대로, 놀데의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원천을 표현해 내는 과정임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가인과 아벨"에서도 놀데는 구체적 대상의 묘사보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집중한 듯합니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에 있는 인물은 동생 아벨, 오른쪽에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을 가인으로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가운데 주황생 후광을 두르고 있는 얼굴은 하나님을 형상화했다고 보면 어떨까요.

먼저 두 주인공의 표정을 보세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벨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매우 허탈해 하며, 잿빛 얼굴을 하고 있어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가인은 아벨에게 무언가를 따지며 위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미 분노와 단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분 가인과 아벨을 그린 그림들이 두 사람의 제사 장면, 살인이나 그 이후 장면을 주제로 삼는 것과 견준다면, 놀데의 그림은 새롭습니다. 특히 가인이 아벨과 맞닥뜨려 살인하기 직전의 장면을 포착한 것은 우리가 본문을 읽고 새긴 내용을 그대로 생각나게 합니다. 곧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가인의 반응에 있다는 겁니다. 삶에 들이닥친 불합리나 부조리의 현상에 대해 원인을 바깥에 돌리는 인간의 본성을, 성경 본문에서도, 놀데의 그림에서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은 뒤에 놀데의 이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시선이 돋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하나님의 시선은 가인과 아벨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이에게로 향합니다. 이것은 표현주의 화가인 놀데의 화풍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 독자들에게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는 아닌지 살펴보라고, 그래서 오늘 내 삶에서 단절과 고립,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아닌지 돌아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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