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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바벨탑 이야기(창11:1~9)

by 비앤피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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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11:1~9)

성경 본문 새기기

- 사람들의 생각, 말, 행동과 하나님의 생각, 말, 행동을 비교해 보세요.

그림 감상하기

피터 브뤼겔, " '큰' 바벨탑", 1563, 목판에 유채, 114x155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이 그림은 본문의 어떤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나요?

- 탑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느낌이 드나요?

 

미술작품에서 성경 본문 읽기

노아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이제 창세기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당대의 기술, 곧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가장 견고한 탑을 쌓아 하늘까지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이들이 서로 소통수단으로 삼았던 말을 흩어버리심으로 무산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사건 보도를 넘어선다면 무슨 뜻을 전하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설화에서도 전해집니다. 먼저 벽돌을 굽는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전 짓기를 원하는 신들에게 마르둑이 하는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요구하는 바벨론을 건설하시오. 벽돌 만들기가 이루어져야 하오. 그 이름을 "성전"이라고 부르시오. 아누낭키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일 년 내내 벽돌을 만들었다.(ANET 68, VI 58~60)

언어와 관련한 이야기도 수메르의 전승에서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전해져 옵니다.(RTA, 112~113)

이날에 나라들은 슈부르(=앗시리아)와 카마시가 되었다. 그들의 언어는 수메르, 고상한 문화를 가진 수메르와 달랐다. 고귀한 나라 우리(=아카드)와 길게 뻗은 목초기에서 잠자는 유목민의 나라들(=셈족이 사는 서방)과 사람이 사는 온 세상은 엔릴께 한 언어로 말씀드린다. 엔키 ....주님 .... 지도자 .... 왕 .... 엔키, 풍요의 주님, 그분의 말씀은 미쁘시다. 땅을 아시는 지혜의 주님, 신들의 지도자, 지혜를 얻으신 분, 에리두의 주인, 그분께서는 현존하는 모든 언어들을 그 입에서 변화시키셔서, 인간의 언어는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이 전승을 바탕으로 볼 때, 고대 근동의 강대국들은 아마도 정복 전쟁을 한 뒤에는 민족 말살의 일환으로 문화정책을 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론어 "바벨"을 굳이 "뒤섞다"는 뜻의 히브리어 "발랄"(히)과 언어유희를 하는 것도 이런 강대국, 달리 말하면 이방인들의 문화정책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는 없을까요?

바벨론 지역에서 발견되는 지구랏이 바벨탑 이야기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굳이 바벨론의 첨단 기술을 빗대어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요? 이것 역시 언어를 나누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유다를 멸망시킨 강대국의 교만한 문화정책에 대한 반감은 아닐까요?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낳는다고 하지요. 본문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그것과 매우 분명하게 대조해 줍니다. 이 대조를 통해 본문의 의미를 이끌어내 볼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의 생각과 야훼의 생각

사람들은 "거기" 머무르려 합니다.(2절) "거기서" 성읍과 하늘을 향하는 탑을 지으려 합니다. "거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익숙한 곳이고,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하여 "이름을 낼 수 있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풍요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그들을 "거기서부터" 흩으시려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여 야훼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이름을 내려는 인간들의 생각을 근본에서부터 뒤집으십니다. 현실 안주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람을 부르고 하신 약속과 명령의 복선이 아닐까요? "떠나라 그러면 복을 주겠다." 익숙한 현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오로지 야훼께 의지하는 순례자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훼의 흩으심은 순례의 길을 떠나 야훼를 만나라는 은총이 아닌가요.

2. 사람들의 말과 야훼의 말

사람들의 생각은 곧장 말로 이어집니다. 입소리와 말이 같은 인간들은 새로 발명한 기술을 써먹자고 의기투합합니다. 심지어 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자고 말합니다. 잘못된 의기투합은 이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본문에 있는 표현대로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그 이면에는 언제까지나 의기투합할 수 있는 한 언어로 남아 있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야훼와의 의사소통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야합과 통제가 가능한 제국의 언어 말입니다. 반면에 야훼께서는 내려가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너무 교만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의 말을 뒤섞어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의기투합의 고리를 끊어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의기투합할 수 없다는 논리가 통하지만,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 문화정책의 교만함에 대한 심판이 깔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상, 이념, 문화에 대한 심판이 깔려 있습니다.

3. 사람들의 행동과 야훼의 행동

"거기" 안주하려는 인간들은 견고한 성읍과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을 쌓았습니다. 그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흩어지지 말고, 자기네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이 나쁜가요? 본문의 문맥에서는 나쁩니다. 하나의 제국, 하나의 통치권을 추구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하나에 야훼 신앙은 없습니다. 바벨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신바벨론 제국은 모든 권력을 바벨로니아에 집중시켰습니다. 다른 어떤 곳도, 다른 어떤 가치관도, 다른 어떤 언어도, 다른 어떤 종교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우선 그들을 향합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 야훼께서는 말을 뒤섞으십니다. 신화에서부터 자국 언어 우월주의를 내세워 제국주의 문화정책을 폈던 바벨론의 언어를 뒤섞어버리신 야훼의 행동은 심판입니다. 더불어 한데 모여 있고자 했던, 흩어지기 싫어했던 인간들을 흩으셨습니다. 이는 바벨론 제국의 멸망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이 심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사건에서야 비로소 다시금 구원 신탁으로 그 길이 열렸습니다.(행2:1~13)

16세기 북유럽 플랑드르 화파의 대표적 화가로 꼽히는 피터 브뤼겔(1525(?)~1569)의 "바벨탑"은 이런 뜻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을 전해줍니다. 브뤼겔의 자세한 생애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초월적인 주제에 집착했던 당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나 매너리즘 화가들과 달리 일상의 상징성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소재는 주로 농민들의 일상생활이 주를 이룹니다. 다음의 그림은 브뤼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농민의 결혼잔치"입니다. 이 그림에는 플랑드르 지역 농부들의 생활상이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피터 브뤼겔, "농민의 결혼잔치", 1568, 목판에 유채, 114x164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피터 브뤼겔, " '작은' 바벨탑", 1563, 목판에 유채, 60x74.5cm, 네델란드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

이밖에도 브뤼겔은 플랑드르 지역의 풍속이나 속담 등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브뤼겔은 앞선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의 영향을 받아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환상적 표현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브뤼겔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위용 앞에 굴복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에 내몰려 "변형되고 비인간회되기" 일쑤입니다.(알레그레티, <브뢰헬>, 48)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바벨탑"을 브뤼겔은 생의 말년에 가까운 1563년에 두 번 그렸습니다. 두 그림 모두 콜로세움을 소재로 하여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그린 그림은 가로 155센티미터에 세로 114센티미터 크기이고, 나중에 그린 그림은 그 반 정도 밖에 안되는 가로 74.5센티미터에 세로 60센티미터 크기입니다. 큰 그림은 전체적으로 색상이 작은 그림보다 밝은 반면에, 작은 그림에서는 탑이 더 규모가 있고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큰 그림에서는 탑을 쌓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지시하는 임금의 모습이 작지만 정교하게 묘사된 반면에 작은 그림에서는 점으로 묘사될 정도로 아무런 구실을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감상한 큰 그림을 살핍니다. 브뤼겔은 바벨탑을 야훼의 시선에서 묘사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대로 "한 언어"에 대한 강조는 결국 정치권력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브뤼겔의 그림 아래쪽에 등장하는 임금과 그 아래 마치 예배하듯 엎드린 사람들, 그리고 임금의 오른쪽 뒤쪽에서 힘에 부치는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은 한 언어를 통한 지배욕을 비웃고 있는 듯합니다. 웅장하게 건설되고 있는 탑을 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암벽을 깨뜨려 쌓아나가야 하는 이 미완성의 탑은 결국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을 느끼게 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반으로 나누어 왼쪽은 그럴 듯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오른쪽은 그 이룰 수 없는 완성이 어둠에 가려진 채 방치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항구에서 올라가는 문을 지나면 짙은 어둠 속에 붕괴의 흔적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게다가 미완성의 암벽 부분 여기저기에 집들이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인부들의 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미 미완성을 감지했거나, 성경 본문대로 소통의 단절로 애초 목적과는 달리 탑에 정착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들이 미완성에 머무르고 말 탑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브뤼겔의 이 그림에서 거대한 탑을 지으려는 사람들은 정작 도구에 지나지 않는 듯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들이 꿈꾸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야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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