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서

다윗과 예수님의 이야기_삼상16장~열왕기상 2장

by 비앤피 2022. 2. 18.
반응형
SMALL

34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13:34~35)

우리 어머니는 이야기꾼이셨다. 내게 다윗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신 분도 어머니였다. 보통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었으나, 다른 기회들도 있었다. 폭풍우 치는 여름날이나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날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눈이나 비가 심하게 오는 겨울날이나 여름날, 또 졸음이 밀려오는 어둑해진 시간에는 이야기 생각이난다. 어머니는 단어 구사에도 뛰어나셨지만 어조 면에서도 능숙하셨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주셨을 뿐 아니라, 능란한 음색 구사를 통해 이야기 전체가 내 내면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게 만드셨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분들은 노르웨이에서 열한 명의 자녀와 함께,인구는 적지만 약속의 땅인 몬타나에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우리 어머니와 이모가 태어나 외가댁 자녀는 총 열세 명이 되었다. 내가 태어날 때쯤,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와 외삼촌 몇 분은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분들이 죽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분들은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노르웨이의 난쟁이와 거인들 이야기도 함께 섞어서 들려주실 때가 많았기에,나는 난쟁이 이야기와 외삼촌 이야기를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야기 전체가 마치 장엄한 신화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통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성경 이야기들 중에서도 다첫 이야기가 단연 선두를 차지했다.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도 다 제치고서 말이다. 다윗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어머니의 상상력이 한층 더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윗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 토대였다 다윗 이야기속에서는 인간적이 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인다운이 라는 단어가 동의어였다.

성장하여 스스로 성경을 읽었을 때,나는 어렸을 적에 아주 좋아했던 몇몇 내용이 사실은 성경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고 조금 실망했다 어머니는 거리낌없이 성경 이야기의 내용을상당히 발전시켜 들려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이야기 방식을 다시 평가해 볼 때 나는 어머니가 그 이야기 자체를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키신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신앙적 상상력을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이야기 전체를 꿰뚫는 중심과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파악하고 계셨다. 아무리 많은 세부적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말했다<꾸며 내었다) 하더라도,어머니는 결코 성경 이야기의 대지를 잘못 잡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그 이야기의 알짜 속뜻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셨고,순종적으로 예수님을 아셨다. 그리고 몬타나 계곡에서 수십 년 동안 기도했을 때 어머니 안에 그 본문들을 새롭게 되살리셨던 성령님도 아셨다.

후에 나는 그런 식으로 교육 받은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바로 그런 식으로 다윗 이야기를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그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도록 신앙적 상상력을 훈련시키고,기도하는 상상력을 현세에 집중시키는 데 사용되 었던 것이다.

다윗이야기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다. 이야기는 성령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문학 장르다. 우리는 이야기를,어린아이들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에게 맞는 단순하고 초보적인 형태의 말로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철학이나 수학 같은 좀더 정교하고 ‘수준 높은’ 언어의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무엇보다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에는 설교,족보 기도, 편지, 시,잠언 등 다른 형태의 문학 형식들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를 널찍하고 본래부터 복잡한 플롯 가운데 담아 내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모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수님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복음서 기자들도 그들의 좋은 소식을 이야기 형태로 전달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거대하고 거룩한 문학적 건축물로 엮어 내어 성부요 성자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하시는데,그 계시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도 바로 이야기다. 그 계시를 바로 알기 위해 우리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일이야기는 바로 다윗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다윗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 다윗 이야기를 들려줄 때나 들을때,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가장 주된 문학 형식인 이야기의 본질을 익히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삶 그 자체가 바로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플롯이 있고 등장 인물이 있으며,갈등이 있고 그 갈등의 해소가 있다. 삶은 사랑과 진리,죄와 구원,속죄와 거룩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축적된 것이 아니다 삶이란 전부 유기적으로,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세한 것들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름과 지문,거리 이름과 지역 날씨,저녁 식사용 양,빗속에 펑크 난 타이어 등,이런 것들이 삶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논술이나 거창한 표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일러 줄 때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인간으로서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를 말해 줄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기술하려 할 때,또 실은 중대하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 주목하고자 할때,또 우리의 행동과 감정에 특유의 질감을 더해 주는 색깔과 모양과 냄새의 미묘한 차이를 음미하고자 할 때,또 직장과 가정에서 갖는 만남과 관계에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할 때 그리고 이웃과 역사 가운데서 우리의 정확한 자리를 발견하고자 할 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예리하고 새로운 세세한 것들을 묘사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는 그 모든 세세한 일들 이면에 깔린,눈에 쉽게 띄지 않는 의미와 목적과 뜻 등을 발견하고 드러내 주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는,사소한 일과 커다란 일이 모두 똑같이 중요하게 대우받고 쉽게 동무가 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초지일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다윗 이야기는 성경에서 너무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야기인지라, 우리는 이 훌륭하고 영감을 주며 위엄 있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별 무리 없이 젖어든다. 그레그러다가도 우리들 대부분은 성경 이야기 속에서 소위 거창한 '영적 원리’나 ‘도덕 지침’ 혹은 ‘신학적 진리’를 뽑아 내려고 하는 평상시의 나쁜 습관에 다 빠져들기 일쑤다. 그러고는 우리 삶에 경건한 모양을 부과하기 위해 억지로 그것들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한다.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보겠다고 하는 일이지만 참으로 무리가 가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그런 시도는 복음의 방식이 아니다. 복음의 방식은 다름 아니라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리 삶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야기는 우리를 그 이야기의 삶 속으로 초대한다 이으혼기 속으로 들어가 상상력올 가지고 거기에 참여할 때 우리는 더 넓고 더 자유론우며더 정연한 세계에 있음올 알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전에는 몰랐다! 그 모든 의미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진실한一성경은 진실함 그 자체다一이야기는 우리를 덜 실제적인 세계가 아니라 더 실제적인 세계로 인도하고,우리의 지평을 넓혀 주며, 우리의 시각과 통찰력을 예리하게 한다. 이야기는 세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가장 주된 수단이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조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럴 때 종종 어른들은,최소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다윗 이야기를 들려주곤했다.

다윗과 하나님

다윗 이야기를 통해 온전하고 충만한 삶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있는가? 무엇보다도 온혼하고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삶이라는 것을 배운다. 물론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은 그 외에도 많다. 위험,부모,적,친구,연인,자녀, 아내,교만,창피,거절,형제자매,병, 죽음,성(性),정의, 두려움,평화 등. 기저귀,팩스»아침 식사,교통 혼잡, 막힌 하수관,부도난 수표 같은 것도 물론 포함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의 전면과 후면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문제는 단순히 천국 전문가들이 살균 처리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다루어져야 할문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땅에서도….” 이 땅과 이 땅의 상황一날씨,소화,가족, 직업, 정부一이 우리가 하나i관계를 맺고 있는 상횡石 정의한디

다윗 이야기는 현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경건한 이야기다. 온전한 삶을 추구하려 할 때 흔히, 아마도 가장 흔히 저지르는 오류는,어떤 모델을 선택해서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다. 그 모델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와 추구해야 할 완전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계속해서 우리에게 거는 아직 덜 되었다”, ‘너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델 모방을 얼마간 시도해 본 후,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더 이상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 일쑤다. 우리의 모델이었던 이들은 박물관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사진사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고 잡지에 사진을 실으면서 많은 돈을 버는 듯이 보이지만,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경에는 특이할 정도로 그런 모델이 별로 없다 대신 성경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바로 다윗 이야기 같은 이야기로.

대부분의 다른 성경 이야기들처럼,다윗 이야기 역시 우리가추구 해야 할 가공된 이상이 아니라,인간됨이 형성되는 장했)인 있는 모습 그대로의 실재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현세/인간의 상황속에서의 전난님의 임재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윗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은,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간 상상력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간됨의 영역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실재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로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존재로一살아가는 한 인간이 갖는 경험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의 여러 차원을 이 정도까지 보여 주는 성경 이야기는 없다 모름지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현고 있을 때 가장 살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전까지 인간은 전혀 살아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 다윗으로만 볼 때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법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배울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불행한 아버지였고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또 순전히 역사학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는 시적인 재능을 지녔던 미개한 족장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윗이 중요한것은,그의 도덕성이나 탁월한 전투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의 체험과 증언 때문이다 그의 전 1생애는 하나님과의 대면이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인간다울 수 없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이다 우리는 삶이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며,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기에 다 의미가 있으며,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에 우리가 다 즐길 수 있으며, 모든 부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우리가 수고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우리가 좋아하든 아니든, 알든 모르든 상관 없이 그분은 존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공급자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 아닌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거부할 때 우리는 부족한 존재가 된다근본적 인 인간다움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만큼 좁아지고 빈궁해진다.

바로 이 부족함에 대한 의식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은 자신에게 무언가 필요하고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충분히 인간답지 못하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러한 미완성 의식은 인간 고유의 독특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더 받거나돈을 더 벌거나다른 장소로 가거나다른옷을 사거나 새로운 체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우리의 이러한 모든 불완전함의 중심과 저변과 사면에 바로 하나님이 자리잡고 계시다고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이 필요하디.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갈증은 인간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다.

다윗 이야기는 이러한 하나님 차원의 인간성,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인간성을 형성하는 데 쓰시는 평범한 일상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해 준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과 하나님이 서로 깊숙이 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리의 상상력은 확장되고, 우리는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모든 세세한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아름다움을 인식하며,더 넓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된다

예수님 이야기

그러나 성경이 들려주는 제일 가는 이야기는 다윗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다. 예수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회전축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예수님 이야기는 다른 모든 이야기를 그 궤도로 끌어들여 그 중심이 되며,그 이야기들에 전체적인 일관성을 부여한다. 예수님 이야기의 중심성은 네 가지 이야기로 표현된다.네 명의 이야기꾼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각자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 들려준다 마태,마가,누가,요한은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것이 인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계시 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 이름을 가진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요한은 단도 직입적이며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1:1,14)

이 이야기 읽기와 관련하여 놀라운 점은,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신적인 요소보다는 인간적인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더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인간이셨음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음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수천 년 동안 지구 어디서나 인간들은 수없이 많은 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신들에 익숙해 있다. 초자연성은 우리에게 오래된 가구만큼이나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성은 신비다. 우리는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남성답게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한 개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면,그 인성을 축소시키거나 제거해 버린 뒤 그것을 순전히 하나님 이야기로만 읽음으로써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로 고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름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존재하시며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 이웃으로 오신 하나님은,글쎄, 그런 하나님은 불편할 정도로 너무 가까이 오신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는 예수님은,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걸어 나온 아테나 여신처럼 완전히 성장하여 위엄을 다 갖춘 모습으로 별안간 신기하게 우리 앞에 등장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천여 년의 유대 역사를 통해 그 전조와 징후와 예기와 준비와 예언과 약속이 나타났다. “기한이 찼을 때에,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여인에게 나게 하시고…”(갈4:4)라는 바울의 인상적인 표현은 바로 이러한 수세기에 걸친 ‘임신 기간’을 두고 한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방식에 대해 이미 충분히 자세한 사전 교육을 받았다. 단순히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나가 된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이다. 이 모든 사전 교육을 통해 분명히 배울 수 있는 것은,하나님의 방식은 바로 역사 속에 자신을 잠기게 하시며,인간들이 그분의 길에 자유로이 참여하도록 초대하시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야기의 바깥에 서 계신 채 그 속에다 번개를 던지시는 분이 아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엄청나게 존귀한 존재로 대우받는다. 인간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너그럽 게 봐주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놀랍도록 존엄한 존재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성부,성자,성령一세 거륵한 신비 ! 세 신성한 무한! 一으로 계시하는 성경에서,인간이라는 말은 결코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쓰인다.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긍정을 받아들이는 데 거북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경험에 따르면 인간은 비열하고 사악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존재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들로 인해 인간됨에 대해 경의를 갖거나 인간 조건을 용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보다는 소위 ‘영적인’ 일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신들같이 ’ 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더 쉬워 보아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애당초 이 모든 곤궁에 빠져들게 된 이유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참고, 창3:4~5) 수세기에 걸쳐 그리고 지금까지도 인류는 신들이니 종교니 하는 것들에 열심히 투자를 해 왔지만, 이를 통해 인간다움이 함양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반대의 효과는 있었다.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인간다움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우리로 하여금의 그분의 인성을 놓치지 않트륵 하기 위해 특별한 수고를 들인다.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태어나셨으며 진짜 죽으셨고 평범한 빵을 드셨으며 평범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꼭 붙들고 있기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그 출생은 동정녀 탄생이었고, 죽음 뒤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뒤따랐으며,초자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그 이야기의 매우 자연스러운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성은 단순한 인성이 아니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의 첫째 사명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 라 증언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명을 다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16:16)고백할 때 시작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존재이시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을 대변하면서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라고 결론적으로 진술한다. 그러나 우리를 그 지점까지,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임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믿는 지점까지 우리를 데려간 다음에,복음기자들은 이러한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실제 재료는 바로 우리의 인간됨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했다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 뒤에,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一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一를 알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난님은 우리의 문제 많은 인간됨을 그냥 우회해 가는 천국행 지름길을 취하지 않으신다. 우리 역시 그러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 일을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으로 해 내는 방법 중 하나는 예수님을 계속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이 칭호는 별 뜻 없는 족보 언급이 아니라 중요한 신학적진술,즉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다. 다윗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를 예기한다. 예수님 이야기는 다윗 이야기를 전제한다. 다윗. 다윗인가? 대답이 한 연러 이유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다의 현세성이다. 그는 두드러질 정도로 너무도 인간적이다. 싸우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죄를 짓는 다윗,야만적인 철기 시대 문화의 도덕과 관습의 제한을 받는 다윗,여덟 명의 아내를 둔 다윗,분노하는 다윗,빗나가는 다윗,마음씨 좋은 다윗,춤추는 다윗 등.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구원과 거룩을 가져오시는 일에 사용하실 수 없거나 사용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로부터 최대의 유익을 얻어 내려면,먼저 다윗 이야기 속에 우리의 상상력이 흠뻑 젖어들게 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다윗 이야기에는 한 번의 기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굉장히 놀랐던 적이 있다. 단 한 번도 기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 이야기 플롯의 중심부에 계시며 그 모든 세세한 사건 속에 언제나 (비록 대개 침묵하고 숨어 계시지만)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그냥 우회해 지나쳐 가지 않는다. 이야기 내부에서 조용하고 꾸준하게 숨어서 작용하는 소재는 바로 다윗의 인간됨이다. 다윗 이야기는 우리의 인간 됨의 현세성에 뛰어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길을 부인하거나 피하거나 경시하게 하는 여러 가지 유혹을 자주 받는다. 우리는 기적이나 황홀경 혹은 번드르르한 초자연적 능력 과시 등을 열을 내며 추구한다. 이러한 영역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지만,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기적과 황홀경과 초자연적 능력 역시 명백히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결코 인간됨으로 부터의 도피처나 인간됨을 우회해 가는 지름길이 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그런 일들 역시 우리의 인간됨 내부에 있는 일이다 오스틴 패러가 말했듯이,예수님 이 목수로 일하실 때 구부러진 못을 펴는 데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성육신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 이야기를 통해,일상 속에 숨어 있는 기적과 자연을 뒤덮고 있는 초자연을 알아보고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법을 훈련받을 수 있다. 다윗을 통해 철저하게 훈련될 때,우리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다는 사실에 쉽게 홍분되어一그것이 '깊은’ 흑은 4더 차원 높은’ 영적 생활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一구명 조끼를 벗어 던지거나 식사 준비를 그만두지는 않게 될 것이다

현세를 사는 영성

평소 나는 내가 명명한 바 ‘액세서리’ 영성에 대해,그리고 헨리 제임스가 “성당 건물과 안락한 사회적 편의 시설 이상이 못 되는” 것이라고 평한 ‘그저 좋은’ 종교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리고 이전에 수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다윗 이야기야말로 거룩으로 넘쳐흐르는 '현세를 사는 영성'(earthy spirituality)을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다윗 이야기를 (그보다 더 거륵으로 넘쳐흐르는) 예수님 이야기를 위한 입문서로 사용한다.

전에는 이 다윗 이야기를 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지금 시대에는 이 길을 찾는 이가 적다. 대신 수많은 심리학자,정치인,경제학자, 인간 관계 전문가, 철학자, 물리학자,생물학자 등이 저마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그 길을 통해 자기 이해,새로운 삶,그리고 ‘영성’에 이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분야 전문인이 다 영성 권위자가 될 판이다! 물론 그러한 길들을 통해서도 배울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다윗/예수님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그것들은 단지 좁은 뒷골목 내지는 돌아가는 길에 불과하다. 또 그 중에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길도 적지 않다.

오늘 도시의 거리와 교회의 의자에는 축 늘어진 남자들,생기 없는 여자들로 가득하다. ‘‘흐늘흐늘한 영혼들이 너무도 많다”고 블랙머는 말한다. 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구원하셨고 성령으로 충만한,참된 삶을 살아갈 능력을 높여 주고 깊게 해주는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 

여기서 다윗의 열정,힘,전심 전력하는 자세,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태도는 분명 우리의 관심을 끈다. 멋진 시편 18편의 중간에서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참으로, 주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시18:29)

성벽을 훌쩍 뛰어넘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주의를 끈다. 달리다가 돌 벽을 만날 때는 주저없이 뛰어넘고 다시 길을 가는 다윗. 골리앗을향해 달려가고, 사울을 피해 달아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요나단을 만나고, 길 잃은 양들을 모아들이며,무엇을 하든 여하튼 계속 달려가는 다윗. 그리고 뛰어넘는 다윗. 그는 결코 어슬렁거리거나 빈둥거리지 않는다.

다윗 이야기는 진정 정열로 들끓는 이야기다. 바로 현세를 사는 영성이 그의 삶의 특징이며 그러한 정열의 이유다.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