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서

다윗과 사무엘 _사무엘상 16장 1~13절

by 비앤피 2022. 2. 18.
반응형
SMALL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사무엘은 턱수염이 무릎까지 내려온 노인이었다 내게 이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셨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묘사하셨다. 그는 똥똥한 체격의 옹골차 보이는 인물이었고,멀리서 보면 하얀 머리카락이 마치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분수 같았다

그는 천천히 심지어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이고,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유유한 느긋함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는 베들레햄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베들레햄은 우리 가족이 살았던 동네처럼, 당장이라도 들짐승이 튀어나올 듯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다. 화살촉을 주우러 들판에 나왔던 세 명의 아이가一그 해에는 가나안족이 홀리고 간 화살촉을 주워 보물처럼 소장하는 일이 아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었다一사무엘을 알아보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그 사실을 급히 알렸다 그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졌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 마을에 오고 있다! 그 전설적인 사무엘 선지자,그 이름 높고 불 같은 성미의 사무엘 선지자가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 누가 죄를 지었나? 사무엘은 그저 별 뜻 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고명한 일생을 통해 보건대,그는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러 이 마을 저 마을 다닐 인물이 아니었다. 대체 베들레햄이 어떤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기에,저 선지자가 그것을 듣고 여기까지 방문하는 것일까?

그러나 불안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사무엘은 흥겨운 예배를 인도하고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 앞에서 축제를 벌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밝혔다 소식은 곧 퍼져 나갔다 마을 분위기는 순식간에 죄책감에서 홍겨움으로 바뀌었다. 어린 암소를 잡고 바베큐 파티가 벌어졌다. 이내 마을 전체가 마치 우리 동네 장날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매년 여름8월 첫 주에 시작되는 최고의 구경거리,장터 말이다 어머니는 철기 시대 베들레햄 이야기를 하시면서 놀이용 탈것이나 큐피 인형,솜사탕이나 핫도그 냄새 같은 것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뻗어 가는 내 상상력을 막지도 않으셨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 완전히 젖어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세세한 내용을 나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던 것이다. 송아지 줄매기 경기,황소 타기 경기,기름기 좔좔 흐르는 돼지,각종 놀이 기구,집에서 키우는 짐승을 끌고 나온 친구들,장식이 달린 셔츠와 빛나는 부츠 차림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온 멋진 카우걸과 카우보이들 등등.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사무엘이 그 마을을 방문한 데는 마을 사람 전체를 모아 예배 축제를 벌이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사무엘은 이새라는 이름의 그 마을 농부와 여덟 명의 아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무엘이 왜 그들에게 그렇게 관심을 갖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축제 분위기에 너무 들떠 있어서 그 선지자가 이새 가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그 축제의 주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무엘이 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지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야기꾼이 내게만 그 이유를 살짝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부 소식통을 가졌던 셈이다 그에 따르면 사무엘은 지금 사울 왕을 대신하여 왕이 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새와 그의 아들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 사무엘은 그들 각자를 차례로 면담하며 자세히 살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장터 마당에 마련된 특별석 중앙에 사무엘이 마치 재판관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새는 아들들을 하나씩 차례로, 마치 포획한 짐승을 굴레에 씌워 끌고 오듯이,사무엘 앞으로 데리고 온다. 특별석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다

맨 먼저 거드름을 피우는 장남 엘리압이 나왔다. 그 우람한 체격하며 다부진 생김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엘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누구인들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엘리 압은 모든 일을 완력으로 처리하는 데 익숙한 야성적인 사나이였다 빗질 해 본적도 없는 검은 머리에,코는 멈출 곳을 찾지 못한 듯 시원스럽게 얼굴 아래로 쭉 뻗어 있었고,항상 작업복 차림에 투박한 부츠를 신고 다녔으며, 양말도 갈아 신지 않았다. 그런 그의 외모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가 반감을 주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못 되었다 그들 모두는 엘리압 앞에서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사나이야말로 재목이로다. 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무엘은 그의 외모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사무엘은 곧 그간 하나님으로부터 훈련받은 예언자적 안목을 발휘해 엘리압의 겉모습 속에 있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 속에는 왕이 될 만한 자질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 나온 아비나답은 지적인 체하는 속물이었다 깡마른 체격에 키가 큰 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과 거만한 자세로 사무엘 앞에 섰다 그는 형제들 중 대학에 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기회만 생기면 학식을 과시할 목적으로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곤 했다. 그는 사팔뜨기 눈에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사무엘은 손짓으로 그를 물러가게 했다

시므아라고도 하는 삼마가 세 번째로 나왔다. 삼마는 캘빈 클라인 청바지에 악어 가죽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잔뜩 멋을 부린 인물이었다. 그는 베들레햄 촌구석의 삶을 혐오했다. 그의 눈에는 시골 사람들이 다 한심하게 보였다. 상스런 놀이와 천한 오락을 즐기는 저급한 인간들과 섞여 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지금 사무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어쩌면 더 고상한 생활一교양 있는 문화 생활_로 올라갈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고개를 저어 그 또한 물러가게 했다

성경은 세 번째 아들 다음부터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15 나는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이야기에서는 그들 모두에게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지어 낸 이름들은 유대인 이름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름들은 어머니의 목적과 나의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아들 이름은 올레(Ole)였고, 그 다음은 검(Gump), 그 다음은 클러그(Rlug),마지막은 처거(Chugger)였다(모두 우스광스런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이다一역주). (훗날 스스로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종종 그 부분에서 빠져 있다는 데 놀라곤 했다. 성령님이 이렇게 훌륭한 구절들을 누락시키셨다니!) 아들들은 이새의 으스대는 소개와 함께 차례로 사무엘 앞에 섰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불합격될 때마다 긴장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一분명 이 아들은 선택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뽑히지 못했다.

구경거리는 끝났다. 이새는 보기 딱할 정도로 실망했다. 일곱 명의 아들이 다 수치를 당한 것이다. 특별석과 일반 관람석에 떼지어 앉아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돈을 환불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 예언자 사무엘이 출연한다기에 상당한 돈을 내고서 여기에 들어왔다. 공연의 앞부분은 아주 좋았다. 숙련된 솜씨로 모든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점점 절정에 도달해 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 결국,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무엘은 몹시 당황했다 혹시 하나님의 메시지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예언자로서의 영력(靈처)이 다한 것은 아닐까? 혹시 엉뚱한 마을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여기 분명 베들레햄 맞소?” 혹시 집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당신 분명 이새 맞소?” 분명 맞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또 다른 아들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고 또 지금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듯이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바로 다윗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막내_히브리어로 ‘하카톤'一라고 불렀다 ‘과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삼상 16:11). 만일 당신이 여덟 형제 중 막내라면 집에서 어린애 이상으로 대우받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카톤’이란 단어는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말로서,중요한 자리에는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할 인물이다. 그저 집안 꼬마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마도 형제들도 같이) 그를 얕잡아 본다는 사실은 그가 집안에서 할당받은 일을 보면 분명해진다. ‘양치기.’ 이는 농장 일 가운데 가장 힘이 덜 드는 일이요,또 잘하지 못해도 별 해를 불러오지 않는 일이다.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이웃집 아이를 돌보는 일이나 슈퍼마켓에서 장보는 일 등에 해당될 것이다.

다윗은 양치기 일을 하느라 먼 곳에 가 있었고 또 평소 업신여김을 받았기에,그 날 그를 베들레햄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윗이 선택되었다. 선택되고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람의 안목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나 형제, 심지어 사무엘의 안목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안목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는 그렇게 선택되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런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실제 일어난 일과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가 너무 달랐기에 그 날 베들레햄 사람들 중에 그 기름부음을 ‘주목해서 본’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 날을 회상할 때,그들은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기는 자리에서 이새의 멋진 아들들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과,또 늘 그랬듯이 다윗이 늦게야 거기에 나타났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은 금세 잊혀졌을 것이다. 곧 그 일곱 형제는 다시 거드름을 피우며 마을을 활보하고 다녔을 것이고, 다윗은 여전히 양을 지키느라 멀리 나가 있어서,시야에서도 멀어지고 마음에서도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내,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다윗이 되었다. 나는 항상 다윗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다윗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언가 다윗과 같은 면이 있음을 -“비록 보잘것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 이야기꾼의 의도요 기술이다.

평범한 사람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많은 플롯과 사건,더 많은 인물과 배경을 제시하며,우리에게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다윗 이야기의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쉽게 간과되기는 하지만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다윗은,흔히 깔보며 낮추어 부르는 말로 '단순한' 평신도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가 빠뜨리고 사무엘에게 소개하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아마 소개할 생각 자체가 아예 들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들에 게도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게다가 그의 족보를 조사해 보면,좋지 않은 피가 섞여 있는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증오와 멸시를 받았던 모압 족속의 피가 섞여 있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꼬마 목동이었던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기름부음 받아,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와 전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분명,모든 평범한 남녀,이름 없는 서민들,별 볼 일 없는 이들,변변치 못한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사람들一다시 말해,이 오래된 행성 지구 위에 살았던 사람들 대다수一에게 힘을 불어넣주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뽑히는 것은 일반 투표에 외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입증된 능력이나 유망한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각종 전문가들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거의 바보로 취급당하며, 전문가에 게 조언을 구해서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만 여겨진다. 그 결과는 그리 고무적 이지 않다. 우리는 몸을 돌보는 일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개인의 건강 수준은 계속 악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학습 책임을 교육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고, 인류의 문화 유산과 역사에 대해 무지하며,광고와 정치의 조롱 섞인 조작행위에 대해 무방비 상태인 대중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대인 관계를 계발하고 회복할 책임을 심리학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친밀감을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저조하고, 정서적 건강은 놀라우리만치 좋지 않으며,우정은 드물고,결혼과 가족 생활은 황폐하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책임을 종교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범퍼 스티커와 TV 유명 인사들이 대중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배하고 있으며,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공연 구경과 영양가 없는 종교 상품 구매에만 강박적으로 빠져 있을 뿐이다 종교 메시지의 전달과 종교 상품 판매는 인류 역사상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활발해졌다 이로 인해 종교 전문가들은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어렸을 때부터 전문가에게 의존하도록 훈련받아 온 일반 평신도들은 여전히 믿음과 기도, 원수 사랑과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에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요한일서 4:8의 원칙(“사랑하지 않는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못합니다.”)을 가지고 시험해 본다면,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의 학점은 아마 마이너스 정도 나올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인간에 대한 성경의 중심 이야기가 평신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윗은 제사장으로 임명받지 않았다. 그는,흔히 하는 말로, ‘사역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그단순한 평신도, ‘하카톤’에 불과했단.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서,그렇기에 그가 부적절하다는 암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인간은, 약동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대담 무쌍하게,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일하는 인간이다.

다윗의 삶은 성경엔서,흔히들 말하는 '만인제사장주의’에 대한 제일가는 실례다. 종교개혁 때 루터는 만인제사장주의를 열심히 주창했지만,이것은 그가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다. 신앙 공동체에는 다양한 직분一예언자,사제,현인, 장로, 사도, 집사, 주교 등一이 있지만,교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일반 평신다. 모든 직분/직무의 취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한 종교 문화 소비자 집단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돕고 격려하며 섬기기 위한 것이다. 종들을 따로 세운 목적은,교회가 무기력하고 무미 건조한 집단으로 퇴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다른 이들 보다 똑똑하고 정력적인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전문가가 되어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2층 구조’가 용납될 수 없다. 성경을 보면 이에 대한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간헐적으로 전쟁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다.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에서는,'작은 사람들’이 결코 추종자나 소비자 정도로 무시 되거나 외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제와 목사들,집사와 주교들,친구와 이웃들이 그들을 섬길 때 그들은 주도적이며 독창적인 사람들이 된다.

이집트에서의 비참한 삶으로부터 구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윗의 조상들은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선언적 말씀을 들었다.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6) 이 말씀을 처음 듣는 순간, 그들은 분명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놀라움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경험으로 인해,그러한 정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집트에서는,몇몇 제사장이 나일 강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사원에 살면서 모든 권력을 쥐고 종교 의식을 지배하며 나라의 업무를 관장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굽실대는 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던 그들은 특권과 권위를 갖춘 상류 계층이었다. 그러한 제사장 앞에서 일개 평신도는 형편없는 초라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카르나크아부 심 벨테베 등지에 서 있는 거대한 조상들 앞에서一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 남아 있는 잔재들만 해도 그 장엄함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인데一누가 감히 제사장이 되겠다고

꿈이나 꾸었겠는가! 슈퍼마켓 계산대 점원이 심장 절개 수술을 해 보겠다고 나서지는 않듯이,트럭 운전사가 747 비행기를 운전해 보겠다고 나서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이 말씀이 들린 것이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광야에 있는 그들에게 성전이라야 간이 텐트 정도였고,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광야 생활에서는 조잡한 평등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제사장을 두라는 말씀이 아니라 제사장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다. 예복도,성직 훈련도, 위계 질서도 없는 제사장 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은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을 때 그들은 정체성들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제사장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벧전2:5,9, 계1:6, 5:10, 20:6)

아무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부름을 받았는지라,그들은 도대체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새롭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사장은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하는가, 제사장은 어떤 성전을 관리해야 하는가,제사장은 어떤 의식을 관장해야 하는가,제사장은 어떤 비밀스런 지식을 가져야 하는가 같은 문제가 아니라,“도대체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나타내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 인간들의 소워을 말씀드리고,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존재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점에서,아니 모든 점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제사장이란 바로 그러한 실재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제사장 역할을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모든 이는 ‘하나님의 형상는로서의 정체성을 배워 갔다. 각자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그분의 은혜를 받으며,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의 약속을 받으며 살아가는 엄정한 신앙 생활을 훈련받았다 이집트를 빠져 나와 홍해를 건너온 그들은 이제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현존 및 활동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들은 잘 하든 못 하든 상관 없이,이미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너무 쉽게 마음이 떠나가기에,하나님을 기억나게 해주고 우리 앞에 하나님을 들이미는 역할을 해주는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것도 많은 수의 제사장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에,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에 두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제사장들의 대부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사장처럼 보이지 않고 제사장 분위기를 풍기지 않으며 제사장처럼 차려 입지 않고 제사장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명 틀림없는 제사장들이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제사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제사장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평생 동안 그는 우리가 낮추어 부르는 말로,단순한 평신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평생 동안 주변 사람들은 그의 삶과 일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다스림과 은혜와 자비를 느낄 수 있었다. 다윗 이야기를 통해,우리는 ‘단순한이라는 형용사로 평신도를 과소 평가하는 관례에 대해 성경으로부터 준엄한 질책을 받는다.

체트 엘링슨(Chet Ellingson)

신앙이라는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 대부분은 평신도다 그런데 왜 평신도들은 신앙 문제에 관해 꼭 공인된 전문가들 - 성직자들 - 의 지배 밑으로만 들어가려 하는지 모를 노릇이다. 목사인 나의 지도만 무작정 따르려 하는 이들을 대할 때마다,나는 놀라움과 유감을 금치 못한다. 그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들’이며 그들 안에는 (막 거듭난 사람들이 보여 주는 보편적 특징안) 스스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일까? 분명 성경이나 복음으로부터는 아니다. 그들은 바로 문화一세속 문화든 교회 문화든一에서 그러한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이다. 전문가로서의 특권과 힘에 애착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의 거창한 허세로 인해 그들은 그만 겁을 집어먹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을 포기하고 그저 가련한 소비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소비자는 그저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교회 장의자에 또 텔레비전 스크린 앞에 수동적으로 잠자코 앉아,종교적으로든 세상적으로든 온갖 착취와 농락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一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一순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과 더불어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전문가/일반인 구분을 철폐하는 임음 평의 과업으로 삼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이를 이루는 데 있어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기도하는 상상력을 가지고 다윗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들은 모든 신앙 문제에서 평신도의 중요성과 중심성에 다시 눈뜰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몇몇 친구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간단한 저녁이었다 우리는 갓 구운 빵 냄새가 그윽한 방에서 푸짐한 토마토 수프와 나물로 맛과 멋을 낸 샐러드를 함께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우리를 초대한 친구가 말했다 “자,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달라지게 만든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어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영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이야.” 모두들 자신에게 그런 영향을 준 사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내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나는 친구들에게 체트 엘링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사춘기 시절에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체트 엘링슨은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사업을 했으며 우리 부모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늘 주변을 맴돌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혼한 경력이 있었고,우리 교회 분위기상 이혼한 사람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 위치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같이 사냥하러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아직 어둑어둑한 가을 새벽,그가 탄 뷰익(Buick)헤드라이트가 도착 신호를 알리면 나는 잽싸게 집 밖으로 뛰어나가 그의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간 후,플래트헤드강 습지의 사냥꾼 잠복 장소에 숨어서 청둥오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2구경 라이플 총을 들고 추위에 몸을 떨며 청둥오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마치 내가 어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체트는 아직 어린 나에게 어른 대접을 해주었다 아직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그는 나를 한 사람의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우리들의 대화에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깔려 있었다. 비록 교회에서 쓰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추위 속에서 예수님,성령, 성경 등에 관해 지극히 자연스립게 대화를 나눴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훈계나 충고를 하려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과 상대해 준다는 식의 태도나 권위주의적인 자세도 전혀 없었다 함께 무슨 대화를 나누든무슨 일을 하든,거기에는 신앙이 깔려 있 함께 총을 쏘고 노를 젓고 사냥감올 모을 때,아니면 일을 할 때나 예배를 드릴 때나,혹은 길에서 만나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조차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미리 정해진 목적 의식을 가지고 나를 대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사실 그는그가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옮겨 가는 길에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엡 4:13) 이르는 길에 다리가 되어 주었다. 비록 당시에는 내가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움’과 일치하는 성인다움올 접촉할 수 있었다 사춘기의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시기에 그와의 교제를 통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성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각자 돌아가며, 신앙을 받아들이고 지속하는 일에서 자신에게 커다란(때로는 결정적인) 영향을을 끼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다 마쳤을 때, 나느 그 이야기들 중 목사나 교수,선교사 혹은 복음 저도잔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_신앙을 갖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일에서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인정받는 사람들一신앙 전문가들一이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체트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우리와 함께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우리 이야기에 등장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준 일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지도자 역할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길을 인도해 주었으며 교훈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 자신을 지도자로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당시에는 그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돌이켜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우리의 영성 형성에 끼쳤던 영향력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날 저녁에 나누었던 대화와 이야기들,또 그와 같은 여러 다른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 이야기에 목사와 전문가,복음 전도자와 선교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삶을 돌이켜볼 때, 나는 내 인생 행로가 조금씩 바뀌어 왔던 계기는 사실 숱한 일상적인 만남들이었으며, 별 뜻 없이 나눈 대화들이 내게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으며, 사람들이 별다른 의도 없이 보여 주었던 태도와 행동들이 나로 하여금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과감한 결단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었던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에 대한 실례들은 끝도 없이 많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을 위해 믿고 기도하며, 사랑하고 소망하며,돕고 인내하며,순종하고 희생하는 일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지금껏 내가 받아 왔고 또 지금 받고 있는 도움과 격려와 지혜의 대부분은,사실 그런 일에서 비전문가로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이야기들  -그러한 삶들!-을 다윗 이야기라는 배경 속에 놓고 바라볼 때 그것들이 전에 없던 의미와 영적인 힘을 갖게 됨을 거듭 발견한다. 왜냐하면 다윗 이야기는 우리를 일상 속에 던져 넣어 담그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우리들의 구원 이야기를 쓰고 계신 장(방)인 우리의 일상 속으로 말이다

이름

다윗의 선택과 기름부음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다윗이라는 이름은 끝에 가서야 비로소 제시된다(13절). 그로 인해 그 이름은 특별히 부각된다. 다윗이라는 이름이 이제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이름은 구약성경에서 600번 이상, 신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다.

개인의 이름은,발아해서 장차 개인적인 이야기로 자라나는 씨앗과 같다 이렇게 하여,조용히 말하는 방식인 이야기는 모든 진리는 개인적이며 관계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개인과 관계를 맺으신다. 즉 하나님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 결코 일련 번호나 추상적 개념이나 목표나 계획과 관계를 맺으시지 않는다. 이름 짓기와 이름 부르기는 언어가 최고로 순수하게 사용되는 형태다.

다윗을 최초로 소개하는 이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그의 역할이나 지위에 대한 언급이 아닌, 바로 그의 이름이다. 우리 각자의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에서 가장 공통적인 요소인 동시에 가장 개별적인 요소다 우리 모두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각자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이름을 갖고 있다 태어날 때나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일련 번호가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 무시당하고 초대받지 못한 인물이었던 한 목동이 예언자와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후 마침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다윗이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