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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사무엘상 2:1~11 _메시아의 신정통지를 열망하는 노래

by 비앤피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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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나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9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11엘가나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삼상2:1~11)

한나의 기도(1~10절)는 사회적이고 역사 변혁적 희구와 기대, 하나님 나라를 매개할 이상적 왕의 다스림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아마도 사무엘을 실로 성소에 나실인으로 바쳤을 때 드렸던 기도일 겁니다. 두 살 남짓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 한나는 개인적 슬픔이나 이별의 아픔을 토로하지 않고 당대의 이스라엘 안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탄식과 개탄스러운 현실을 거룩하게 변혁시켜 주실 하나님의 개입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1절은 그녀의 대적 브닌나에게 당한 굴욕과 수모를 되갚아 주신 하나님의 의로운 간섭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환희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경지는 고도로 승화된 영적 수련자에게만 허용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기뻐하지만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한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은 공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진리와 함께 베풀어지는 사랑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뿔이 야훼로 인해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뿔은 염소나 소가 다툴 때 쳐드는 공격 및 방어용 무기입니다. 그것은 각축과 다툼의 기세를 표현합니다. 한나는 브닌난의 적대 행위와 모욕을 받으며 그것을 자신을 향한 그 시대의 악한 세력들의 공격으로 간주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뿔로 대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불임녀였기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있었고 패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한나의 뿔을 높혀 주셔서 원수를 향해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다"는 말은 원수의 기세를 꺾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을 할 때 말로 원수의 기세를 꺾는 일부터 시작합니다.(삼상 17장 골리앗의 경우, 사36~37장 산헤립과 렙사게의 말싸움) 한나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으로 사무엘을 얻고 그를 하나님의 성소에 바침으로써 자신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 행위이지만 그것은 공적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행위는 이웃들에게도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혜택을 분여하는 행위입니다.

2절은 야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을 노래하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다른 열방들의 신들과 비교될 수 없는 무한히 구별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림을 목말라하며 애통해 하는 보잘것없는 영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물 같은 인생의 속 깊은 울음과 탄식에 공명하시고 그것에 예민하게 소통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보좌 신들의 보좌와 호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홀로 자존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절대적으로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신에 하나님은 가련하고 무력한 개인의 피할 바위시요 반식이십니다.(신32:30~31) 반석은 의로할 만한 하나님, 폭양과 비를 피할 은신처와 피난처로서의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한나는 사사 시대 말기에 하나님을 반석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이 땅의 가장 연약한 백성들과 심정적으로 공명하시며 사랑과 인애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임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회적으로 공의롭고 자애롭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장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의 인생을 100퍼센트 실현한 성공한 사람들, 어떤 방법으로든지 출세와 부귀영화를 이룬 사람들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의문사되고 사회의 가장 하층 백성들은 무신론자로 살아가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한나는 가상의 적들을 상정하여 명령하고 있습니다. 적대자들에게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브닌나로 대표되는 한나의 대적자들은 교만한 말, 오만한 말로 한나 같은 의롭고 외로운 영혼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오만하고 교만하게 들릴 언어를 하나님을 향해, 연약한 이웃을 향해 마구 터뜨렸습니다. 오만과 교만은 권세를 가진 자들, 기득권을 휘두르는 자들, 다른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관여하는 자들의 으뜸 죄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악행과 불의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게시는 지식의 하나님(엘 데오트)이시오, 행동을 달아 보시는 측량과 헤아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오만한 자들의 행동을 심판의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단5:24~28) 우리의 허언과 거짓과 진리와 크게 괴리된 행도으이 무게를 달아 보십니다. 진실을 담지 못한 가볍고 경박하고 번지르르한 언어를 무력하게 하십니다.

4절은 용사와 넘어진 자의 운명 반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사"는 사사 시대 말기에 형성되고 있던 군사 엘리트 계층으로서 부자, 지주, 관료들의 넓은 땅을 지켜 주며 생활하던 준 직업군인, 혹은 용병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대개 부자들만이 활로 자신을 무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용사의 활이 꺾이게 됩니다. 대신 다른 사람에 의해 넘어진 자들은 힘으로 띠(요대)를 띠고 일어섭니다. "넘어진 자"는 엄밀하게 말해 용사들에 의해 넘어짐을 당한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사와 너어진 자의 운명을 뒤바꿔 버리십니다. 무력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용사들의 활은 정의와 인애, 진리와 자비의 하나님 앞에서는 용도 폐기됩니다. 넘어진 자는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기쁨의 띠를 띠고 소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넘어진 자들에게 힘입니다.(느8:10)

5절도 유사한 운명 반전의 이미지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시므로 전에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해 품을 팔고 전에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아이를 낳고 못낳는 무제가 단지 한나 개인의 불행과 원통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였음을 암시받습니다. 한나는 불임의 고통을 겪으면서 당시의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넘어진 자, 주리던 자, 아이를 낳지 못하던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것입니다.

6절은 좀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변혁적 활동을 노래합니다. 한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음부)로 굴러떨어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스림을 노래합니다. 그녀는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운명을 통쾌하게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해 노래합니다. 야훼는 한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빈부의 차이는 영원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7절) 더욱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십니다. 성경과 중국사, 그리스 로마 제국의 역사 등 세계사는 이런 신적인 섭리에 의한 운명 반전 드라마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요? 비천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이 한 왕조를 열기도 하고 한 회사를 창업하기도 하고 위대한 성공을 일구기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상류층, 부자,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영구적으로 차지하겠다는 의도를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토에서 자아낸 가난한 자와 거름더미에서 건져 올린 빈궁한 자를 땅의 기둥들로 삼으셔서 당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 세계를 땅의 기둥들 위에 세우셔서 안정감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시듯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의미의 통치자와 신령한 귀인들이야말로 창조 질서를 떠받치는 기둥 가튼 존재인 것입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약적 사랑과 인애를 받는 당신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소멸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처분에 대항하여 어떤 용사도 힘으로는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9절) 10절은 야훼를 대적하는 자의 운명을 노래합니다. 야훼를 힘으로 맞서 대적하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마침내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당신의 뜻을 대행하는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입니다.(10절) "자기 왕"과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동일한 인물인데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이상왕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처음으로 메시아, 곧 이상왕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인간 대리자에게 위임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력을 의미하는 감람유) 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정치를 하는 이상적인 버금왕을 의미합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대행할 이상황이 출현하여 악과 불의로 굳어진 기존 질서를 거룩하게 변혁할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왕은 세계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울 지상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대리자에게 힘을 더하시며,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고 대리하는 이상왕 메시아가 세계를 정복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정의가 불의를, 자비가 잔혹함을, 사랑이 폭력의 질서를 정복하고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한나는 이런 하나님의 이상왕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나의 노래는 철저히 사회변혁적 기도로서 역사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녀는 의로운 왕이 없는 사사 시대 말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의 총체적인 난국(삿21:25)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식으로 가득 찬 한나였기에 그녀는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홀로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장엄한 사회적 모성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자녀를 사유화하여 한 해동안 20조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쏟아 넣은 이 땅의 일그러진 모성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적 모성애입니다. 한나는 의로운 메시아가 도래할 희망을 노래하고 그 희망의 등불을 자신의 심령에 밝혀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바치고 엘가나와 함께 라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이" 혹은 소년(나아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야훼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11절) 이 11절 하반절은 주어(나아르)가 앞에 나오는 상황절로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엘가나의 길과 엘리 앞에서 야훼를 섬기기 시작하는 사무엘의 기을 대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아르(아이)에 불과한 사무엘을 성소에 남겨두고 돌아가는 한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여인이었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길만이 자신이 드린 서원을 갚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은 그 시대의 공동체를 위해 바쳐진 제물의 삶을 살도록 운명지워진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곧 성직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데 자신의 일생을 거룩하게 투신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직자 중에 이런 고전적이고 고상한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무엘은 이제 엘가나와 한나의 아들이 아니라 실로 성소의 제사장 엘리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실로 성소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부름받기까지 영적 수련과 학습에 돌입할 것입니다.


결론

한나의 기도는 언뜻 보면 기복적인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근의 기도는 역사의식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찬 제사장적인 기도요 중보자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갈망은 브닌나라는 개인적인 대적의 격동과 핍박에서 비롯되었으나 원한이 깊어 갈수록 그녀의 기도도 깊어 갔습니다. 한나는 브닌나와 자신 사이에 있는 갈등이 바로 그 시대의 중심 갈등을 대표한다고 보았습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보았듯이, 당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유목민적인 야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리고 가나안 농경문화에 급속하게 동화되어 가던 상황이어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농경문화에 취하여 형제우애적인 연대감을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지방 토호 세력들의 불의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이 가나안 동화를 막고 야훼 신앙을 보존하고 부흥시킬 사명자로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함으로써 개인적 불행을 돌파하고 시대를 살릴 아들을 잉태하기에 이른 겁니다. 자신이 아드을 낳아 대적자 브닌나에게 복수하고 그 아들을 출세시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의 중심 질병을 고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돌볼 지도자로 양육하기 위해서 아들을 원한 것입니다. 남자 아들 후계자에 대한 가부장적 집착이라는 모순을 뚫고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기도를 바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는 자신의 자녀를 시대의 사명자로 세우는 모성애, 즉 사회적 모성애를 구현한 것입니다.

성경은 위기의 순간마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생명의 물길을 연여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에덴동산에서 "산자의 어머니"로 칭송된 하와에서부터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이태하는 위태로운 사명을 감당한 마리아게 이르기까지, 성경의 구속사는 여성들의 순종, 고난, 믿음으로 결정적인 반전을 이루며 지행되었습니다. 여성의 지도력은 한마디로 잉태와 해산의 지도력이었습니다. 잉태는 창조를 위한 고통의 감수를 의미합니다. 해산은 그 고통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합니다. 성경의 여성 지도자들은 현대적인 여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과격했는데, 그들의 급진성과 과격성은 자신들의 의지를 하나님 나라의 대의 아래 쳐서 복종시키는 데서 오는 급진성이며 과격성이었습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여성 지도력은 투쟁적이고 호전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남성 위주의 문화를 능히 초극하는 포용과 오래 참음과 견고한 연대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살림"(하와)의 지도력입니다. 여성 지도력은 남성 중심의 호전적이고 경쟁적인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지도력입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예수님의 여제자들은 오랫동안 그리고 질긴 슬픔과 흐느낌을 가지고 예수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칼날에 저미어진 가슴을 안고 참담하게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배회하는, 오열과 해소되지 않은 슬픔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은혜를 덧입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여성들의 지도력은 직관적이고 충동적일 정도로 행동적이며 위태로운 환난의 시기에 힘을 발하는 지도력입니다. "죽음"을 조롱하는 지도력입니다.

오늘날 한국 어머니들의 모성애는 공동체를 혹독한 야수적 원형경기장으로 몰아가는 파괴적인 모성애입니다. 어머니들의 경쟁적이고 호전적인 교육열 때문에 우리 자녀들의 생명력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매년 사교육에 쏟아 붓는 돈이 약 20조 원이 넘습니다. 돈을 가진 부모들이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한 학원 교육과 특목고 열풍으로 이 땅의 자녀들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만을 생각하며 이렇게 이기적으로 희생할까요? 사회적 모성애를 발휘하는 어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행주대첩에는 사회적 모성애를 실현한 여성들의 활약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1593년 2월의 행주대첩에서 고양군 벽제의 여성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운반하고 뜨거운 물을 끓여 왜군들에게 쏟아 부어 성을 지켰습니다. 여인들의 사회적 모성애 때문에 조선군은 3천 명도 안 되는 군사로 3만 명의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모성애란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외부 대적들을 격파하는 전투적인 모성애이며, 이기주의적 가족주의를 초월하는 모성애입니다.

"우리" 자녀만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들어간다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섬처럼 고립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가정의 자녀들이 다 행복해야 "우리"자녀도 행복한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모성애처럼 한 시대를 살릴 아들을 낳아 길러 내는 데 투신된 사회적 모성애가 몹시도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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