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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이삭의 출생 이야기(창18:1~15, 21:1~7)

by 비앤피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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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18: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을 땅에 굽혀
18:3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18:4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18:5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18: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18:7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18:8아브라함이 엉긴 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18: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8: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8:11아브라함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8: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8: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8: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18:1~15)
21:1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1:2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1:3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21:4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21:5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21:6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21:7또 이르되 사라 자식들을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21:1~7)

성경 본문 새기기

- 본문에서 사라는 왜 웃었고, 결국 그 웃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림 감상하기

안드레이 류블로프, "삼위일체", 1410년 무렵, 패널에 탬페라, 112x141cm,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삼위일체"라는 제목과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보나요?

- 이 그림은 원근법이나 단축법의 관점에서 대상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요?

미술작품에서 성경 본문 읽기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과 사라는 관습을 도구로 하나님의 약속을 제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애꿎은 희생양만 낳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은 뒤에도, 90세가 되도록 사라의 태를 열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이때까지 하갈과의 갈등만 잘 해결된다면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창17:18)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이름을 바꾸시며 다시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창17:16) 이 약속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 엎드려 웃고 맙니다.(17절)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18장에서도 이어집니다. 같은 약속을 아브라함을 찾아 온 세 사람이 합니다.(창18:9~10)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라가 웃습니다.(12절) "그가 웃는다"는 뜻의 이름 "이삭"(이츠학(히))의 유래는 이렇게 설명되었습니다. 이삭을 임신하기 전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오는 실소였을 겁니다. 이 실소는 여태껏 약속을 붙잡고 살아온 100년 세월의 회환이 담겨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약속의 성취에 한 몫을 해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 과거가 짙게 배어 있는 웃음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태어난 뒤에 그 웃음은 감사로 바뀝니다. 창세기 21:6에서 사라가 자신의 웃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선사하셨다. 그러니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이들도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개인번역)

이렇게 볼 때, 이삭의 출생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실소에서 성취에 따른 감사의 웃음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사실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던 순간,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 사람을 대접하던 순간이 그 전환점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장 1절과 2절을 가만히 읽어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대접했던 그 세 사람은 다름 아니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18: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18: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18:1~2)

물론 많은 이들이 1절 첫째 문장과 둘재 문장 사이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곧 이 문장과 나머지가 서로 다른 출처에서 비롯했다는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읽는 창세기 본문에 마지막 손질을 가한 이부터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이들은 1절 첫 문장의 야훼와 이어지는 구절의 세 사람을 동일시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이 본문은 삼위일체 교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동방교회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에서는 그리는 방법까지 정형화 되어 전해 옵니다.

비잔틴 미술에서 이런 그림은 이콘(icon)이라 불립니다. 동방교회의 이 이콘 문화는 매우 독특합니다. 화가들의 창의적 상상력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을 더 중요시하여 누가 그리더라도 그리는 대상의 모습이나 의미가 동일하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콘은 성경의 진리를 전하고 보는 이가 그 진리를 체험하도록 하는 상징적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콘은 그리는 대상을 도식화하고 간소화하며, 변형하거나 일부분을 과장합니다. 더욱이 중요도에 따라서 크기를 달리하여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역원근법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이콘의 몇몇 정형화된 특징을 살펴보겟습니다.

큰 눈 : 심오한 것을 보았기 때문
큰 귀 : 주님의 계명을 들을 준비
좁고 긴 코 : 세상적인 것을 맡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성의 향기를 맡고 있음
작은 입(수염으로 가림) : 꽆 필요한 음식만 취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아감, 낙원의 행복과 무소유욕에 대한 표현
긴 손가락 : 가리킴을 받는 분과 그분의 업적이 위대함을 가리킴
흰 색 : 깨끗함
검은색 : 신비의 깊이
진청색 : 시원함과 투명함
초록색 : 희망과 안정
노란색 :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
붉은색 : 신비한 본질의 불꽃과 뜨거움
하늘색 : 하늘빛의 광채
(카레아 수도원, <이콘을 아십니까?>, 32~34)

앞서 우리는 14세기 위대한 이콘 화가로 꼽히는 안드레이 류블로프(1370~1430)가 그린 "삼위일체"를 감상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잘 알려진 대로 우리가 살핀 본문을 소재로 합니다. 이 그림은 템페라 기범으로 그려졌는데, 템페라 기법이란 목판에 회칠을 한 뒤, 리넨 천을 덮고 그 위에 달걀과 물을 용매로 한 혼합 채색 안료를 쓰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대부분 템페라 층이 벗겨져서, 세 천사의 얼굴이나 옷은 후대에 덧칠한 것입니다. 창18:8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세 사람에게 치즈와 우유, 송아지 요리 등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류블로프의 이 그림은 모든 것들을 간소화하여 표현합니다. 그림 왼쪽 위에는 아브라함의 집으로 여겨지는 구조물이 성당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간소화하여 그린 상수리나무가 있고, 식탁에는 모든 음식물이 생략되고 영성체로 보이는 것을 담은 그릇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류브로프의 그림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시점에서 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도 아브라함과 사라와 동일한 시점에서 야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곧 성경 본문을 읽고 이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이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정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재는 우리를 더 높은 하느님의 섭리의 깊이로 불러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천막은 궁전과 성당이 되고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는 생명나무가 된다. 소머리가 담겨 있는 식탁 위의 그릇은 감사 성사의 잔으로 대체된다. 세 명의 천사의 모습은 일반적인 신체 비율보다 훨씬 길게 그려진다. 역원근법으로 그려지며 이콘을 지켜보는 신자와의 거리감은 사라진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든지 계심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류블로프가 창조해낸 전체적 구도의 밝음, 가벼움, 독특한 신비스러움은 하나의 높은 이상을 만들어 낸다.

실소를 감사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자리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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