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서

아케다(창22:1~19)

by 비앤피 2021. 9. 8.
반응형
SMALL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여호와의 사자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여호와의 사자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 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 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창22:1~19)

성경 본문 새기기

-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인신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으리라 상상하나요?

그림 감상하기

반 다이크, "아브라함과 이삭", 1617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119x178cm, 체코 프라하 나로드니 갤러리

- 반 다이크의 그림에서 표현된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정에서 어떤 내면을 읽어낼 수 있나요?

미술작품에서 성경 본문 읽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결박할 때 쓰였던 동사 "아카드"에서 온 명사를 써서 "아케다"로 불리는 이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제대로 이해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노년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을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질(대하3:1) 모리아 땅의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어떤 점을 시험하시려 한 것일까요? 또 그 시험이 왜 하필이면 인신 제사 명령일까요?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자면, 아브라함은 수수께끼 같은 이 명령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뒤, 3절에서 아브라함은 바로 짐을 챙겨서 이삭과 함께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 사이에 있는 빈자리에서 우리는 과연 아브라함의 고뇌를 읽어야 할까요? 히브리서 11:17~19에서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 이후로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구절의 해석을 보자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자손을 이으리라고 약속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약속대로 이삭을 인신 제사로 드려서 죽더라도 살려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겁니다. 이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이 해석대로라면 본문 2절과 3절 사이의 행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부활 신앙으로 설명됩니다.

과연 구약의 문맥 자체만으로 그럴까요? 구약성경의 율법에서는 이방 종교에서 비롯한 인신 제사를 엄격히 금지합니다.(레18:21, 20:2~5, 신12:31, 왕하16:3, 17:17) 그리고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미6:6~8)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을 인신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사사기에서 입다의 잘못된 서원으로 딸을 인신 제사 드린 사건이 있고(삿11:31~40), 열왕기에서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가 자기 맏아들을 인신제사로 드려 전쟁을 끝낸 데 대해서 침묵하기도 합니다.(왕하3:26~27) 그렇다고 이 두 사건이 인신제사 명령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인신 제사 대신 동물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외아들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살펴보시려는 시험에 통과했음을 선포하십니다.(창22:12, 16) 그리하여 이야기는 "야훼께서 살피신다"는 뜻을 가진 이 땅의 이름 "야훼 이레"에 대한 기원론 구실을 하는 동시에 후손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창22:17~18)

이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어 보입니다. 우선 히브리서의 해석대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믿음과 순종의 확인을 위해 하는 시험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원 이면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인식에 대한 교육의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 아브라함이 과연 부활 신앙으로 묵묵히 인신 제사의 길을 나섰을까요? 사실은 이 점에 대해 절대 침묵하는 본문의 의도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언급한 율법 규정들이 당시 이방 신앙에서 행해졌을 인신 제사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더 나아가 이삭은 하나님의 인신 제사 명령을 당시 종교 관습에 따라 숙명으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신들도 다 그것을 최고의 헌신으로 여기므로, 아브라함은 가슴 아프더라도 묵묵히 따랐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막으신 것은 당시 종교 관습에서 보면 절대 반전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마 이삭의 목을 칼로 내려치기 전, 하나님의 사자가 전하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숫양을 발견했을 때, 당시 이방 존교의 신과 하나님의 근본적 차별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본문도 아브라함의 종교적 성장사로 여길 수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씨받이 관습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제멋대로 이루려 했다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뼈저린 교훈으로 익혔습니다. 여기서도 아브라함은 당시 성행했을 인신 제사 관습의 고리를 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그런 뜻에서 이 본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관습의 고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끊으라는 데로 초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본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관습의 고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끊으라는 데로 초대합니다. 루벤스(1577~1640)의 제사로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화풍을 잘 보여 주는 화가 반다이크(1599~1641)가 그린 "아브라함과 이삭"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우리 본문을 그린 여느 그림들이 대부분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데 비해, 이 그림은 불씨를 든 아브라함과 장작을 든 이삭이 길을 걷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부분은 아브라함의 표정 묘사입니다. 당시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던 반 다이크답게 본문 2절과 3절 행간에 있는 빈자리를 아브라함의 표정으로 채웠습니다.

가슴을 향하고 있는 오른손과 이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브라함의 시선처리는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또 다른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훌륭한 빈자리가 되어 줍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하나님의 순종 시험에 임해야 하는 아브라함의 회한과 인신 제사 관습에 젖어 있던 아브라함의 양면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구체화된 아브라함의 표정은 이 양면적 감정의 복잡한 심상을 훌륭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 그럼에도 오로지 약속만을 믿고 여기까지 하나님을 따라온 아브라함, 그럼에도 여전히 이전의 관습과 신앙관에서 완전히 떠나오지 못한 아브라함, 그것을 본문 결말을 아는 감상자는 본문의 행간을 이 그림에서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