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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상 1~3장 _사무엘의 소명

by 비앤피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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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입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1:1) 저자는 마치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꺼내듯 이렇게 글을 시작합니다. 사무엘서의 매력은 하나님과 인생, 민족과 역사에 대한 심오한 영적 진리가 흥미진진한 설화(narrative)의 재미와 시의 영감 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뛰어난 문학성을 발휘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체제 변혁이 일어나는 전환 시대를 기록하면서도 마치 전원 교향곡의 서장을 듣는 것처럼, 또는 평화로운 전원 문학을 대하듯 부담없이 엘가나와 한나 부부의 가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이어 젊은 종교 지도자들마저 부패한 이스라엘의 정신적 위기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를 통한 사무엘의 출생(1장), 성장 과정(2장),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민족을 정신적 파탄에서 건지는 역사(3장) 등 새 시대를 알리는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1장이 문제로부터 시작해(2절) 해결로 끝나는 데 있습니다.(28절) 그 문제란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1:2) - 곧 한나의 불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신을 못하는 한 여인의 안타까움은 이스라엘이 겪는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있었습니다.(1:3)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 불임증, 그리고 시대의 얼굴인 지도자들의 타락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대의 얼굴

엘리는 본래 성품이 착하고 기본적인 신앙이 있어서 40년 동안 사사와 대제사장의 직분에 비교적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1:9) 비록 한나의 기도를 주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큼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부족한 점이 엿보이기는 하지만(1:3), 다른 한편 그녀를 격려하고 축복해 주는 목자다운 자상한 모습도 보입니다.(1:17) 그리고 그는 후에 사무엘을 키워 민족의 지도자로 세운 공로자이기도 합니다.(1장, 3:1)

그러나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과오는 공적 활동이 눈부신 사람들의 가정에서 흔히 보듯 자식 교육에 실패한 점입니다. 그가 노환을 앓으며 눈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은퇴하지 못하고 성전을 지킨 이유는, 아마 마땅히 대를 이어야 할 자식들이나 다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집을 맡길 만한 인재로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2:22, 3:2)

후에 사무엘의 아버지가 된 엘가나는 매년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를 데리고 실로에 있는 서소로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1:3) 있었다는 기록은 독자들을 섬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이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살지게'(2:29)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제물의 기름을 먼저 태운 후 가슴과 우측 뒷다리를 제사장 몫으로 규정한 제사법(레3:3~5, 7:30~34)을 어기면서 제물 중에서 가장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세 살 갈고리(2:13)까지 사용했고, 반항하면 종들을 시켜 폭력을 써가며 백성을 위협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멸하고 예배를 멸시하며 백성을 조롱했습니다.(2:17)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2:17)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결혼한 몸으로 하나님의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방에 드나드는 짓까지 했다는 것입니다.(2:22) 이런 행동은 당시 성소에 창녀나 남창을 두어 성행위를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삼았던 가나안 종교의 추악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섯오를 러브호텔같이 더렵혀놓은 셈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진리에 대한 사랑과 민족애로 불타야 할 젊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열을 쏟아야 할 방향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일까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1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4:6) 엘리도 그의 두 아들도 '여호와를 알지 못한' 영적 무지로 멸망의 길로 빠져갔던 것입니다.

위 도표는 엘리의 두 아들의 경우나 사도 바울이 고발했던 로마시대(롬1:18~32),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적 원리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의 정신 세계나 도덕 생활에는 절대 규범이 없어져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궁창에 "될 대로 되라'고 몸을 던지게 됩니다. "저차원적인 것은 고차원적인 것으로만 지배된다"는 것은 물리학이나 수학적 공리일 뿐 아니라, 영적 세계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종이요 백성의 최고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다면, 가슴 아프지만 마땅히 자식들을 공개 처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순결하게 보존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2:29) 고작 한 차례만 책망하고 묵인함으로써(2:23~25) 의보다 정을 앞세우는 가족 이기주의를 보여줍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우상이 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엘리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죄를 청산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슬쩍 넘어가는 사회를 후손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건물의 기초는 정의입니다. 교회도 국가도 정의의 기초가 든든해야 참다운 질서 위에 번영하고, 정의의 기초 없이 부만 쌓았을 때는 얼마 못가서 무너지고 맙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라는 말씀을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가 먼저 의를 행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도자가 앞장서서 불의를 자행하거나 묵인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의 사회 구현이란 구호를 외치게 한다면, 그 사회는 어느새 부패와 불신의 암세포와 무섭게 퍼져 치료 불능의 위기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식민지 시대의 죄악된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파들을 감싸주던 소위 기독교 정권이나, 인권을 유린하며 불의를 자행하던 군부 폭력 정권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주던 교회 지도자들이 다음 세대로 흐르는 민족사의 강물을 어떻게 혼탁하게 하였는가를 돌이켜볼 때, 엘리가 책임져야 할 역사적 과오가 무엇인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백성

개인이나 공동체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만고 불변의 하나님의 역사 원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사무엘서 전체의 요절이라 할 수 있는 2장 30절 말씀을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2:30)

이처럼 영적 권위의 상징인 대제사장이 무기력해지고, 새 시대의 기대와 소망을 안고 있던 젊은 제사장들마저 탐욕과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어 도덕적 권위를 상실했을 때, 그들을 지도자로 받들고 따르는 백성들의 분노와 실망감은 어떠했겠습니까. 더구나 당시는 모세 5경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백성들은 신앙과 행동의 근거를 오로지 제사장들의 말과 모범에 의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각자 자기 마음대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엡4:22) 살고 있으니 백성들이 겪는 정신적 당혹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불신 사회는 지도층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버리는 데서 비롯됩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뽄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출19:5~6) 그러나 사사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저버리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되는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삶의 절대 기준을 상실한 당시 백성들의 정신적 혼란을 성경 저자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이 말씀은 <현대인의 성경>은 "사람마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하였다", <공동번역>은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라고 옮겼습니다. 사람마다 제멋대로 행하니 이스라엘 공동체는 마치 교통 신호도 법규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속력을 내어 차를 몰다가 정면으로 부딪혀 이제는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를 보면 경제적으로는 제법 여유 있어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갈피를 못 잡고 도덕적으로 고삐가 풀려 온 백성이 '기'가 빠진 채 비틀거리는 모습입니다. 정숙한 주부들도 술취한 상태로 성소에 오는 것이 예사였고(1:14~15), 성소에서도 음행과 폭행이 '습관적'으로(2:13) 행해지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나타나는 거룩한 영광을 볼 줄 모르는 그 시대의 얼굴들과,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백성들로 인해 암울함이 더욱 짙어가던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며, 절망의 밤이 가장 깊을 때 소망의 여명이 어둠을 깨고 밝아오는 것은 성경에 거듭 나오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주제입니다.(창15장, 출2:23~25, 사5:30~6장) 저자는 초월자가 역사에 개입하여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로 자시의 예정된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먼저 존귀하신 하나님의 새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1:3)

만군의 여호와(The Lord of hosts). 이것은 사무엘서 저자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1장 3절에 사용했고 열한 번이나 반복하는 '사무엘서의 하나님'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군'이란 첫째, 하늘의 별들, 둘째, 영계에 속한 천사와 영들의 군대, 셋째, 땅의 이스라엘 군대를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집행할 우주의 모든 세력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주재로서 하늘의 천군 천사를 거느리며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초월자이십니다. 동시에 땅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군대도 지휘해 당신이 세우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사무엘서의 하나님은 우주 만물에 대하여 창조주가 피조물에 대하여 당연히 갖는 주권(sovereignty)으로 섭리(providence)하시되, 첫째, 창조, 둘째, 보존, 셋째, 인도, 넷째,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사14:24, 27, 46:10)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자식을 뛰어들어가 건져내는 아버지가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식 이스라엘을 위한 구출 작전을 펴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되 '남은 자(remnant)'를 통해 일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나, 엘가나,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2:27)이 그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것 같은 시대였으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사6:13), 지극히 어리고 연약한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하는 사람이 다수를 따라 떠나지 않고 시대의 예외자들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치 원수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특공대를 보내어 교두보(beachhead)를 확보하게 함으로써 작전을 전개시키는 치밀한 전략가요 뛰어난 작전 지휘관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서 떨쳐버리기 어려운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회개시켜 쓰시기 않았을까? 하필 불임의 여인에게서 아기를 태어나게 하여 쓰시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하셨을까? "그거야 뭐, 하나님의 주권이지" 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그러면 성경 공부가 재미없어질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령탑에서 나오는 작전 명령을 추측해볼 수는 없을까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1:5,6)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화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25)

하나님께서 일부러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예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짜놓으신 각본에 맞추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역설적 진리는 불합리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시원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교파마다 해석이 다른 교의적 주장에 귀기울이거나 이해가 빨리 안 된다고 제쳐두지 말고, 차분히 사무엘서를 계속 공부해나가면 언젠가는 믿음으로 인해 종합적인 이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알아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 엘리와 그의 아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2:27~36),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에게 고통 가운데 기도하게 함으로써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동시에 펼쳐나가십니다. 하나님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렘1:10)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세 인물 아브라함, 다윗,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마1:1)는 모두 불임의 여인들 곧 사라, 한나, 엘리사벳의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믿음으로 이어져 생명 창조의 능력과 기쁨을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역사 방법이 어떠한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보내고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을 기름부어 다윗 왕국을 세움으로써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어찌보면 답답하리만치 느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원을 두고 시대를 보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뒤에서 밀려오는 파도만이 앞서가는 파도를 밀어낼 수 있듯이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을 밀어낸 후, 새 사람을 통해 새 역사를 펼쳐가려는 뜻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긴박성과 여유성의 역설적 진행 방법은 합리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경이와 신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오목을 두는 사람이 바둑 국수의 수순을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한나의 기도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산고를 겪어야 하는 것처럼 환희의 새 역사를 출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먼저 고통과 슬픔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해내려오는 미신적 고정 관념 때문에 불임의 여인들은 무언가 숨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지 못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라이벌인 브닌나가 비웃고 학대할 때마다 한나의 슬픔은 한이 되었고 가슴에 앙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1:6~8)

그래서 한나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위로보다(1:8), 해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영혼의 안식 기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나는 남편도,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자기만의 문제를 부여안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1:15~16)

한나는 하나님 앞에 자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 자기심정을 모두 토해내는 고독한 영혼의 절규요, 몸부림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시지만 인생의 눈물 방울 하나하나까지 다 헤아리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고통과 슬픔, 무거운 짐, 답답함, 억울함과 분노, 불평과 증오, 어쩔 수 없는 나의 연약함, 나의 소원,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쏟아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시편에 구구 절절 스며 있고 행간마다 묻어 있는 시인들의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해마다 성전에 다니던 한나의 신앙에 그녀의 생을 바꾸어놓는,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게 될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라마의 집을 중심으로 지극히 제한된 세계 속에서 개인과 가정 외에는 별로 관심 없던 한나가 '매년'(1:3, 7)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면서 관심의 영역이 확대된 것입니다.

2장에 나타난 노래를 볼 때 한나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자기 성에서 벗어나 점차 하나님과 자기 민족을 보는 의식의 눈이 열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영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성소에 자리잡고 있는 창녀들을 보며 자신의 고통보다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예리하게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아낙네처럼 매년 늘어가는 잔주름이나 껑충 치솟는 물가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는 민족의 신앙과 도덕 수준을 보며 아픔이 더욱 절실해지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고통이 크게 느껴지는 만큼 개인의 아픔은 작아졌을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이제 단순히 자기 문제를 아뢰는 데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의식의 변화, 기도 제목의 확대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눈이 흐려진 엘리, 뻔뻔해져가는 홉니와 비느사흐를 바라볼 때마다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민족의 재난이 악목처럼 눈앞에 펄쳐지면서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영적 지도자, 즉 모세와 같은 민족 구원의 출현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판에 박힌 일상적 기도 대신 목숨을 내건 특별 기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얍복강가의 야곱처럼(창32:24~30),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눅22:39~44), 생명을 내건 깊고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하나님을 높이며 자기를 낮추는 태도는 경건의 척도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 부릅니다. 여자만 아니었다면, 아니 현대와 같이 여자의 활동 무대가 어느 정도 보장된 사회 환경이었더라도 한나는 아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형편으로 한나가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길은 아들을 낳아 하나님의 일에 바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일생을 세상 사람과 구별시켜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된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었습니다.(민6:1~21, 30:2 참조)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을 낳자 그녀는 아들 이름을 사무엘 즉 "하나님이 드셨다"라고 지었습니다.(1:19~20) 한나는 지식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새롭게 되새겼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여자의 서원은 변심하기 쉽다 하여 남편이 취소할 수 있었으나(민30:6~15 참조) 엘가나와 한나는 서원대로 젖 뗀 후 독자를 바친 아브라함같이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1:24~28)

저자는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1:28)라는 말로 한나의 인생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래가 극적으로 변화될 것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한나의 영혼에서 환희에 찬 승리의 노래가 얼어붙었던 땅을 치솟아 피어오르는 봄의 꽃망울처럼 터져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8절 서론이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신학적 요약이듯이, 2장 1~10절의 한나의 노래는 사무엘서 전체의 주제를 집약시킨 '신학적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2:1, 10)

노래의 주네는 개인과 민족의 형편을 뒤바꿔놓으시는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입니다. 뼈아픈 고통의 세월과 사무엘을 품에 안고 젖먹이며 기도하던 뿌듯한 은총의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하나님을 아는 한나의 지식은 놀랍도록 깊어졌습니다.(벧후3:18) 한나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2:6) 하나님 앞에 생명을 바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삶을 얻었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2:7) 하나님 뜻대로 일생을 영혼의 참 평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임을 자기 인생에서 체험한 한나는 민족의 형편도 틀림없이 역전시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겨레의 소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100년 후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해 이루어질 다윗 왕국과, 멀리 천 년 후 그리스도가 이루실 메시야 왕국까지 내다보며 한나는 예언자적인 시를 읊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낭송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한나의 노래를 읊조리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마이라의 노래(눅1:46~55)가 얼마나 한나의 노래와 비슷한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한 여인을 통해 혼란스런 시대를 바로잡는 역사를 이루시는 분임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기독교 교회사 2000년의 가장 어두운 위기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여인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루터의 아내 캐티,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등이 그러하며 어느 시대의 어느 하늘 아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심정을 토해놓은 여인들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셔서 한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를 들으신 후에야 사무엘을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있는 문제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지 않습니다.(God does nothing redemptively except through prayer)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을 두고 일하시는데 왜 반드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삼으시는 은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나같이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여인들의 기도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 시대에 '야한' 여자도, 살림 잘하는 '밥상 차리는 여자'도, 자아를 성취한 '물 위를 걷는' 여자도 많고, '우먼 센스'나 '리빙 센스'를 갖춘 여자들은 잡지 부수만큼이나 많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타임 센스'를 가진 여자, 만군의 여호와께 '무릎 꿇는 여자'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를 쓰는 여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라가는 사무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라서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쇼'를 하며 일하기보다(눅17:20~21) 조용히 사람 키우는 일을 즐겨하십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비행을 고발하는 한편,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어린 사무엘의 성장 모습을 흥미롭게 대조시킵니다. 사무엘은 젖을 뗀 후 그러니까 세 살쯤 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후 10여 년을 성소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 성장 모습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21)

사무엘이 홉니와 비느하스의 영향으로 잘못 나가기 쉬웠을 텐데 소년 시절을 순결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특별해 보입니다. 배후에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또한 매년 절기마다 정성껏 옷을 지어다주고, 성소에 머물면서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훈계가 그 마음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일 겁니다. 바른 기독교 자녀 교육의 목표는 자녀들이 '사람 앞에서'만 경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라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성장 모습은 예수님의 성장 모습과도 같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6)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부모는 자녀들이 균형잡힌 인격으로 성장하도록 교육시킬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생명의 청지지들입니다. 그 교육의 내용리나 첫째,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는 건강 교육, 둘째 지혜가 자라도록 돕는 지식 교육, 셋째,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스럽게 살 줄 알게 하는 사회 교육, 넷째,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워가는 신앙 인격 교육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앞의 두 가지만 강조되는 세속적 교육 철학에 미혹당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자녀의 신앙과 인격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엡 6:4)해야 합니다. 시대를 위해 일하는 것은 바른 자녀 교육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엘리는 자녀 교육에 실패함으로써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으나, 한나는 자녀 교육에 성공함으로써 마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그 시대를 저자는 예리한 선지자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렇게 진단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3:1)

선민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얼굴인 지도자들의 부패와 각각 자기 옳은 대로 행하던 일반 백성들의 방황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만민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높은 도덕 수준과 정의로운 사회, 안정과 평화의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 이삭, 야곱 같은 민족의 조상들은 모두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에 정착했으며, 그들의 구체적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역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획되고 실천된 것이며,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를 맺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막 건설과 예배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모세는 회막에 들어가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십계명이 든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천사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인과 민족의 '갈 길과 할 일'을 찾았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민7:89)

모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들려줌으로써 때로 소망을 주고 때로 회개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열두 지파는 그 땅을 분배하고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에 안정이 찾아오자 성소도 실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은 성소에 찾아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소는 백성의 예배 장소였을 뿐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한, 이스라엘은 공동체적 방향을 잃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 말기에 이르러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성소를 더럽히게 되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하게 된 이유는 지도자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수준의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높은 수준의 도덕 생활을 요구합니다.

반면에 주변의 가나안 종교는 말씀 듣는 귀의 종교나 정신적 가치가 앞서는 신앙이 아니라, 보이는 상(image)을 숭배하는 눈의 종교이기 때문에 믿기 편하고 쉬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말씀을 저버리고 현세적 번영과 감각적 쾌락까지 허용하는 물신 숭배의 미신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소에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스라엘에는 '이상(vision)이 흔히 보이지 않게'(3:1) 되었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다.(잠29:18) - 공동

영어 흠정역(KJV)은 이 말씀을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비전이란 현실을 정확히 통찰하는 분별력(insight)과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선경지명(foresight)을 동시에 갖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비전을 본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분노에서 어떤 대안에 대한 진지한 탐색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공동체가 비전을 상실할 때는 현상에 대한 분노 대신 오히려 현실에 순응하다가 점점 '백성이 방자해져서' 고삐 풀린 말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처럼 사회적 혼란이 가속화되기 마련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이처럼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종을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예비해두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먼 엘리를 대신해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여 비전을 보여줄 예언자를 갈구하는 역사적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때는 늙은 엘리도 잠자리에 누웠고(3:2) 어린 사무엘도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으나'(3:3)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3:3), 먼동이 트기 직전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습니다. 또한 사무엘의 신앙 상태는 어떤 시기였습니까?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3:7)

그동안 사무엘은 영적으로 자기를 아들로 삼은 엘리의 가르침 아래서(3:16) 율법을 배우고 성소의 제사법도 익히면서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꽤 많이 습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 일대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형성되지 못한 때였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고의적으로 하나님보다는 죄를 사랑했기 때문에 '여호와를 알지 못했으나'(2:12), 사무엘의 경우는 어리고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 없어서 '여호와를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이 마치 엘리가 부르는 소리같이 들려 몇 차례나 엘리에게로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3:4, 6, 8)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는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자기를 제쳐놓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사무엘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3:8~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성격에 대해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때때로 어떤 권위 있는 인간의 부름이나 조직체로서 교회나 선교 단체의 부름으로 오해하거나 혼동하기 쉽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대적인 인간의 부름과 혼동할 때 그 일생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사명인으로서의 종의 길을 걷고 있는가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마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3:10)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아"하고 7,8회나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 한 사람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서 고독하게 서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엘리도, 한나도,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우리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못 들은 척하고 자기 뜻을 고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응답할 때까지 천 번 만 번이라도 계속되며 끝내는 개인적 결단을 내려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강권적인 부르심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명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뜻하는 소명은 사명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사명은 시대를 살려내는 말씀의 종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부름 받은 사무엘이 구체적으로 할 일이란 사사요,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뿐 아니라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난과 축복이 함께 따릅니다. 사무엘이 감당해야 할 첫 사명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와 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3:11~14) 순종하기 힘든 사명이었으나 사무엘은 엘리의 도움을 입어(3:17)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고'(3:18)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듣는 사람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고 전하는 것이 말씀의 종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당한 고난은 주로 사람이 듣기 싫든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실한 말씀의 종의 삶, 그리스도의 제자도에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빌1:29) 본 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를실 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제자들을 부르신 후 명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귀한 절대 가치이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의 목숨까지 내걸어야만 하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명인의 삶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모두 "나 같은 것이 무엇이관대" 하며 부르심의 은총에 감격하며 생명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일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와 보람이 담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사무엘의 말씀 운동

3장의 처음 세 절과 마지막 세 절을 대조시켜 살펴보며 말씀이 희귀하여 비전이 사라진 시대가 뒤바뀌어 새 시대의 예언자 사무엘에게 신선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를 통해 온 이스라엘에 말씀이 전파되어 백성들이 비전을 보게 되는 가슴 뿌듯한 희망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19~20)

'사무엘이 자라매' - 이것은 물론 사무엘이 부르심 받은 후에도 성인으로 성장했다는 표현도 되겠지만, 동시에 그가 말씀을 종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공적 활동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간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쓸 때 '준비의 원칙'을 고수하십니다. 모세, 다윗, 세례 요한, 베드로, 바울 등 모두 오랜 준비 끝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공적 활동은 준비 기간에 비해 짧은 것 같으나 그 영향력은 오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 활동을 위해 30년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까.

2000년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서도 교회와 사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은 인물들은 영성, 학문, 인격의 모든 면에 연단받아 준비된 사람들이었븐디ㅏ.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1703~1546)나 존 칼빈(1509~1564), 영국의 부흥 운동가 존 웨슬리(1703~1791)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요나단 에드워드(1703~1758)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젊은 날 매우 인상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는 속물로 전락하는 모습을 주위에서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본인이나 그를 숭앙하던 사람들에게 큰 슬픔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나이가 들어서도 일생 동안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선지자로 인정받은 것은 '그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의 성취 여부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가르는 잣대입니다.(신18:21~22) 새롭고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자 이스라엘의 북쪽 끝단에서부터 남쪽 끝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실로에 있는 사무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4:1)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하나님께서는 다시 실로에 나타나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한 사람 선지자를 통해 서서히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을 발휘하면서 퍼져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고 말씀의 운동력을 강조했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거듭나게 해서 새 사람을 만드는 운동력이 있으며(벧전1:23), 교회를 개혁시키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운동력을 발휘합니다.

1세기의 시대악에 도전하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저자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행6:7),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깊이 있는 신학과 투철한 역사 의식을 소유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주석입니다.

예를 들어, 여신 다이아나 숭배의 중심이었던 에베소의 두란노 학원에서 바울이 3년 동안 날마다 성경을 가르치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마술책들을 모아 발살랐는데 그 값이 무려 은 5만, 요즘 시가로 치자면 5억 원이 넘는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은 이처럼 사회를 변혁시키는 운동력이 있음을 역사적 사건을 증거로 확신시켜주는 기록입니다.

일찍이 중세 유럽의 부패한 교회와 국가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말씀 운동으로 혁명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말씀 운동

한국 기독교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성경 말씀에 기초한 민족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이만열 교수가 인용한 한말과 일제 초기에 한국 주재 특파원으로 있던 영국인 기자 맥켄지의 <한국의 독립 운동>의 한 대목은 당시 영국인 평신도가 가진 성경관과 말씀이 갖는 힘찬 사회 변혁 능력에 대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멸절되는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든가 하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이 시대는 갖가지 종류의 성경도 많고 현재 우리 한국은 교회, 신학교, 선교 단체, 기독교 서적, 설교 테이프 등으로 말씀의 홍수에 떠내려갈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구의 25%인 기독교회는 인군의 1.2%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이 3.1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그 영향력만큼도 운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말씀이 풍성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한 의미에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 많은 설교, 뜨거운 경배와 찬양, 숱한 세미나와 교회 행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영혼은 그토록 피곤하고, 사회는 이토록 부패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가고 있을까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형식적으로는 말씀이 풍성한 것 같아 보이나,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면적으로는 영적 기근의 시대가 아닐까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모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러기며 여호와의 말씀의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위한 말씀 운동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말씀 운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이며, 그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스라의 결심(스7:10)과 같이 첫째, 성령의 조명과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운동이요, 둘째는 그 말씀을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의 모든 분야, 국가와 세계, 환경 문제 등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창조적으로 적용시키며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인생과 공동체는 항상 문제가 있는데 성경에 반드시 해답이 있음을 믿고, 그 해답을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말씀의 종의 사명입니다.

셋째는 성경을 가르치는 운동입니다. 말씀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사상이 바뀌고 생활 양식이 변화되기까지 성경의 어느 부분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하하신 뜻'(행20:27)을 바른 성서 신학의 기초 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돈, 은사를 부지런히 활용하여 정열을 가지고 꾸준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 모든 문화를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이땅에 기독교 문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운동은 먼저 말씀의 전문 사역자들인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합니다. 특히 엘리같이 현실 개혁에 무기력한 지도자들을 대신해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같은 새 시대의 말씀의 종들이 '현상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말씀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생들과 대학생들부터 바르게 훈련받아야 하는데, 만약 이들마저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간에 우리 시대를 선지자적 통찰력을 가지고 진단한 후, 시대를 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운동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3:10)

우리가 앞으로 하게 될 사무엘서 성경 공부도 말씀이 희귀하여 비전이 없는 이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 운동에 참여하는 작은 몸짓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가슴에 깊이 새겨놓아야 합니다.

15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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