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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상 11~12장 _나라를 새롭게 하는 이스라엘

by 비앤피 2022.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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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 11:14~15)

이스라엘은 민족적 숙원을 이루어 군주 체제의 틀을 세웠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그럴 듯한 군주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사 시대의 체제에 길들여져 있고 사무엘의 지도력을 따르던 백성들이,갑작스레 왕정이 되고 어디선가 나타난 시골 청년을 인물만 멀쑥하다고 왕으로 따르기엔 거리끼는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10:27 — 공동) 하고 멸시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헌법도 만들고 지도자도 세워놓긴 했는데,민심이 지도력을 따라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도기를 맞은 이스라엘

이러한 시기를 역사의 과도기라고 합니다. 사회의 사상과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도기를 사는 백성들의 삶의 특징은 혼란스럽고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위기 의식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과도기는 역사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가 됩니다. 어느 공동체가 이 시기에 백성에게 애정을 가지고 승복할 수 있는 뚜렷한 공동 목표와 이상을 제시하고,또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는 지도 세력을 얻을 때 역사는 진보합니다. 반면에 공동체적 이상의 실현보다는 안일과 현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도 세력이 득세할 때 역사는 퇴보하고 공동체는 혼란 속에서 생존권마저 위협받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위에 오른지 한 달 만에 과도기적 혼란을 벗고, 지도 체제를 세웁니다.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온 백성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사사 시대는 막을 내리고, 드피어 군주 시대로 역사의 새 장이 열립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과도기적 혼란을 단시일에 극복하고 공동체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예언자 사무엘의 역할 덕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 역사의 두 주인공 사울과 다윗왕에 대한 기록을 왜 사무엘서’ 로 이름지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사무엘의 리더십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교회와 국가 또는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며 사울을 왕으로 선포하고 화목제를 드린 사건을 중심으로 언약의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거룩한 분노

왕으로 세움을 받았으나 아직 중앙 정부가 선 것도 아니요, 통일된 군사 지휘 계통이 확립된 상태도 아니어서, 사울은 예전의 사사들과 같이 평소에는 소를 몰고 밭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11:5) 형식적으로는 왕으로 세움받았으나 아직 백성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나 지도력은 위기에서 인정받게 됩니다. 고대 국가에서 왕의 지도력은 주로 전쟁에서 평가받았는데,사울도 그지도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이벌어진것입니다. 본래 암몬 족속은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생긴 민족인데,호전적이고 잔인해서 이스라엘을 늘 괴롭혀왔습니다(창 19:38, 삿 3:13). 암몬이 당시 두 지파의 반 중에서 요단강 동쪽에 정착한 므낫세 지파에 속한 야베스 사람들을 침공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의 식민지가 되는 조약 맺을 것을 제안까지 했는데 암몬왕 나하스는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언약하리리”(11:2) 라고 모욕했습니다. 곤경에 처한야베스사람들을 ‘구원할자’ (11:3)가없다는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졌습니다.

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11:6)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명예를 짓밟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 대한 분기가 치솟았습니다. 이것은 죄악된 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의분(義I貪)이었습니다. 중세 교황청을 지배하던 악의 세력에 대한 루터의 분노처럼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불의와 악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반증(反證)이 됩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상황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울은 순식간에 33만 명의 군사력을 집결시켜 암몬 군사를 물리치고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군중 동원의 카리스마와 작전 지휘관으로서의 군사적 통솔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이쯤 되자 아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되겠느냐고 하던 자들이 누군지, 그런 자들은 죽여버리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11:12, 공동번역). 우쭐해져서 실수하기 쉬운 상황이었지만, 사울은 자제력을 갖고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13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11:13)

보복 대신 관용 베푸는 사울은 권력 행사보다 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덕치국가(德C國家)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으며 겸손하게 백성을 다스리며 놀라운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자세로만 계속 나갔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의 도덕적 위임

사울왕의 자리가 확고해지자 사무엘은 사사의 위치에서 물러납니다. 이제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2장은 흔히 사무엘의 '고별 메시지'라고 합니다. 아마 시간적으로는 11장 14~15절의 화목제를 드리기 앞서 선포한 설교인지도 모릅니다. 이로써 사사 시대는 종언을 고합니다. 고별 메시지에 나타난 지도자 사무엘의 모습은 리더십 빈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듯, 지난날 자신의 공적 활동 기간의 청렴 결백한 삶을 증거합니다.

3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12:3)

사무엘은 “누구의 것을 빼앗았느냐’고 반복해서 질문합니다. 누구나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한몫 해두려는 욕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착취,거짓, 억압,뇌물 등 공직 사회의 부패에서 순결을 지킨 지도자였습니다. 열방의 지도자들이나,뇌물을 받아 가문을 더럽히고 아비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아들들과 달랐습니다. 공무원과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돈과 섹스, 권력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모세나 이사야 등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들처럼 무슨 특별한 실력이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 다음으로 높임 받는 선지자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영적 권위와 도덕적 위엄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지도자가 물질의 탐심에 사로잡혀 청빈 생활에 모범이 되지 않으면 결코 지도력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짜기 이 걸음으로'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고결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역사 의식

사무엘은 열려있는 지도자 였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형편을 바라보고, 영적 통찰력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였습니다. 12장 6~11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끊임없는 구원의 역사와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줄기찬 배반의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이 구원의 하나님을 또다시 저버리고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좇아 하나님 대신 인간 왕을 통해 구원을 기대하는 과오를 지적합니다.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산타야(G. Santayana, 1863-1952)의 말처럼,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다시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쥐와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쥐가 고양이에게 잡혀 먹는 이유는 스피드가 뒤지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 의식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쥐는 고양이에게 쫓겨 쥐구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숨었다가, 그만 과거를 잊고 그 구멍에서 다시 나온다고 합니다. 역사 의식이 있는 고양이는 참고 기다렸다가 다시 같은 구멍으로 나오는 쥐를 냉큼 잡아먹습니다.

이 시대를 섬기는신앙 지도자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예언자적 통찰력에서 나오는 역사 의식입니다. 개인 경건과 교회 성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만 눈길이 고착되면, 민족 공동체가 나아갈 역사적 방향에 눈이 먼 사맹(史盲)이 되기 쉽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민족 공동체의 앞날을 바라보도록 맨 먼저 역사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신앙적 용기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받은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려’ (딤후4:3-4) 합니다.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대신 오히려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종들이 고난을 피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자 타협하여 발람 같은 거짓 선지자가 되기 쉽습니다(민22장,벧후2:15-17). 그러나 사무엘은 용기 있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12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삼상12:12)

내 인생과 나라, 인류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이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나라보다 군주 체제를 통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단호하게 백성들의 죄를 들추어 내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엘리와 다른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17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삼상12:17)

밀을 추수하는 오뉴월은 이스라엘의 건조기입니다. 그러나 우뢰와 비를 보내는 기적으로 하나님의 확증을 받자, 백성들은 비로소 영적인 두려움에 잡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12:19).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회개의 복음이었습니다(막1:4, 14).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하며 전한 말씀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복음 이라고 요약했습니다(행20:21). 그러나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만 합니다(갈1:10). 또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정치 체제 속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해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미련없이 떠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나 사회 단체나 비생산적인 장기 집권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의〈몽당연필〉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사무엘은 깨끗하게 소멸하려 합니다. 이 점에서 사무엘은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는 자세로 역사 속에서의 자기 위치와 사명에 순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이익을위해 사사로운감정이나 이익을 포기할 줄알았습니다.

사무엘의 방향 제시

사무엘은 회개한 백성들이 과거에 얽매여 낙담하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돌려 앞을 내다보게 하며,하나님 앞에서 공동체가 어떠한 원칙과 목표를 가지고 살 것인가 방향을 제시합니다.

14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15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삼상12:14~15)

백성과 왕이 다같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지만, 거역할 때는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을 거듭 경고합니다(12:24-25). 이스라엘의 왕은 결코 열방과 같은 군주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왕권 아래 순복하는 하나님의 종이요, 새로운 형태의 통치 수단이 될뿐입니다. 그러므로 군주 제도가 신정 체제에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장차 하나님과 인간 왕 사이에서 충성의 우선 순위 문제가 발생할 때를 위해 하나님 주권의 신성 불가침을 역설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백성들에게 심어줍니다.

22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12:22)

왕정으로 불안하게 출발한 백성들에게 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는 구절에 ‘자기 백성’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암송해보십시오. 나의 가정,모임, 교회,겨레를 대신 넣어보십시오. 마음에 새겨진 찬송가가사처럼 이 말씀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를붙잡아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정치와 종교의 역할 분담

사무엘은 앞으로의 자기 역할에 대해서도 뚜렷한 방향을 잡고 백성에게 공표합니다.

23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사무엘은 그동안 영적 지도자로서 선지자, 대제사장의 역할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인 사사의 역할까지 혼자서 담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넘겨주고 영적 지도자의 사명, 즉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의 직분과 예언자로서의 외로운 갈 을 가르치는 직분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스라엘에 최초로 정치와 종교가 역할분담을 하는 역사적 분기점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근거로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이나 '정교유관론(政敎有關論)'을 편다든지, 또는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 어떤 신학적 결론을 내리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를 볼 때 이 주제에 대해 명료한 단답식(單答式) 해답 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1000년 이상 이것은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킨 복잡한 난제입니다. BC 1050년경 신정 체제를 가진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특수 상황을 현대 국가나 교회에 신학과 사회 과학적 체계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문을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와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그 기능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정치와 종교는 많은 부분이 서로 맞물려져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서로 협조, 견제, 비판할수 있다는점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부패해서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탈세 등 범법 행위를 했을 때는 국가 공권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정부가 부패했을 때는 교회가 정권 투쟁 차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 운동의 차원에서 정의의 편에 서서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단순화 되는 위험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국가는 광범위한 자율적 통치를 허용받았으므로, 교회가 정치적으로는 수동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주장하여 흔히 '정적주의적’ 입장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칼빈은 국가를 종교적 규범과 통제 아래 두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정치에 대해 훨씬 더 크고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이른바 ‘행동주의적’ 입장을 택합니다.

사무엘의 메시지를 통해 볼 때, 교회가 민족 공동체를 위해 가장 힘써야 할 것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제사장적 사명입니다. 이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는 비판과 교육 선도의 예언자적 사명입니다.

우리는 신학적 입장이 어떠하든 우리 사회의 구조적 죄악은 한 개인이 선한 양심만 가지고 살기에는 이미 그 도가지난 것을깨닫고,사회 변혁을 위해 기독교회는 국가사회에 대한 예언자적,제사장적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언약 체결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지도력이 어떻게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출해왔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정치적 파워 게임에서 승리를 거둔 정치꾼이 아니라,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충성스럽게 백성을섬긴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정치 권력을 사울에게 이양하면서 사울의 지도력이 하나님과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울이 민족적 영웅 대접을 받게 되자, 온 백성을 길갈에 모아 대관식을 갖습니다.

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11:14~15)

사무엘은 어떻게 나라를 새롭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삼고 화목제를 드리는 과정을 통해 이루었습니다. 화목제 (peace o能ring)는 백성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화평의 바른 관계를 이룬 것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출24:5, 11, 레7:11-17, 22:21-23). 또한 제물의 피는 서로 목숨 걸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언약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화목제를 드리는 의식 (儀式)이 왕을 세우는 역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첫째,이스라엘 백성이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한 죄를 범함으로써 파기되었던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제 죄사함 받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는 예식이었습니다. 둘째,앞에서 말했듯이 이스라엘의 군주제도가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신정 체제 안에 흡수된 특별한 형태로 세워진 것을 확인하는 언약 체결식 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의식이 하나님과 왕, 그리고 백성이 맺은 ‘언약의 3중주 (covenantal triad)’ 라고 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의 ‘듀엣’ 관계를 맺어왔습니다(출 24장 참조).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직선적 언약 관계가 하나님과 백성, 그리고 왕의 삼각형 관계로 새로운 형태의 언약 ‘트리오 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정치 개념은 교회 정치의 기본입니다. 교회에서의 장로 선거를 예로 들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자로 후보를 내고, 회중이 성경의 근거 위에 관찰하여 선거한 후(딤전3:1-7), 장립식을 가질 때 하나님과 장로, 회중이 삼각적 언약으로 서약하고 취임합니다. 또한 기독교 문화의 기초 위에 민주 국가를 세울 때 그 정치는 삼중적 언약 을 기본 틀로 하여 성립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통치자, 둘째, 하나님과 피지배자, 셋째, 통치자와 피지배자의 계약 관계입니다. 통치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언약의 내용은 선거 공약 으로 표현됩니다. 12장의 사무엘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왕, 백성 사이의 언약내용을 밝힌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 개념으로 정치를 이해할 때, 약속을 지키는 도덕적 기초가 없는 불신 사회에서 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자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후, 하나님의 허용 아래 왕을 세워 새로운 국가 체제를 확립한 것을 축하하는 큰 축제를 가졌습니다.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11:15)

나라를 새롭게 하는 길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정치 지도자들을 새로 선출한다고 나라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정치 의식이 발달하고 체제와 구조를 바꾼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공동체의 구조적 결함을 개선하고. 악법을 개폐(改廢)하려는 급진적인 정치 운동은 모두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갸륵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운동은 가장 '근본적인' 운동이어야 합니다. 영어로 ‘급진적’ 이란 뜻의 ‘radical 은 그 어원이 라틴어의 radix(뿌리)’ 입니다. 뿌리, 즉 근본으로 다시 돌아갈 때 가장 급진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가정, 교회,국가, 세계 공동체에서 상황에 따라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개혁 운동, 곧 새롭게 하는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의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새 사람이 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무리 지성 사회에서 미련하게 들리고 인기 없는 말이라 해도, 온전히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듯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과 학문적 설득력을 가지고 일해야하겠습니다(고전 1:22-25).

대부분의 정치 이론은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에 대해 비관적 견해를 갖게 될 때 강압 정치를 펼 것이요, 낙관적 견해를 갖게 되면 자유 방임 정치를 펴게 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양면성과 현실성이 있는 정치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선한 가능성이 있으며,동시에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무한히 악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개인은 선한 경향이 있으나 국가 조직은 악해질 경향이 더 크다는 라인홀드니버(Iteinhold Niebuhr)의 주장도 귀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부패 성향을 가진 권력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상대화시키는 구조가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망원 렌즈 효과(the eflfect of a telephoto lens) 라는 표현으로 설득력 있게 말합니 다. 망원 렌즈의 초점을 멀리 둘수록 가까이 있는 물체는 더욱 그 거리가 가깝게 보이듯, 하나님의 주권이 높고 절대적이 될수록 인간 사회에는 정치 사회적 평등이 더 보장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을수록 사람들 사이가 더욱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할수록 목사와 평신도는 가까워질 것이며,하나님의 법도에 복종하는 사장이라야 종업원과 차별이 적은 대등한 관계를 이루어 공동체에 정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야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여 세우신 지도자들을 더 존경하고, 기도하고,협조하며 따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백성에 그 지도자’ 가 있습니다. 앉기만 하면 정치 지도자를 욕하는 데에만 익숙한 우리 백성들의 태도는 결코 기독교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물을 키울 줄 알고 세울 줄도 알아야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는 법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훌륭한 정치가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며 세워주는 분위기가 얼마나 아쉬운 세상인지 모릅니다. 성서의 기초 위에 국가를 건설한 종교 개혁 국가들이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훌륭한 정치가들을 배출하여 수준 높은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근거 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나의 새로워짐 , 나라의 새로워짐은 모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탄식했듯이,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전 1장). 우리 인생도 부패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며, 부패한 인간들이 모여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해 위에 계신 궁극적 존재만이 해 아래 있는 인생을, 그리고 공동체를 비롯한 만물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과 우주의 창조주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만왕의 왕,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먼저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이 되고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골 3:10). 크리스천들이 개인적으로 거룩한 인격을 소유하고,공동체의 변혁을 위해 헌신하고 기도하고 연구하며, 선하고 의로운 도를 증거해야 나라와 겨레는 끊임없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특히 젊은 크리스천들이 사무엘 같은 예언자들로 자라야만 교회와 나라에 새 소망이 있을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우리 하나님은과연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5그때 보좌에 앉으신 분이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하시고 이어서 "이 말은 진실하고 참되다. 너는 이것을 기록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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