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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상 4~7장 _이방신을 제거하는 이스라엘

by 비앤피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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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4:22)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7:3)

본문의 내용은 언약궤 사건(4~6장)과 사무엘의 활동(7장),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본문을 읽으면 독자들은 조금 어리둥절해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말씀의 종으로 부르심 받은 사무엘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는데, 저자가 느닷없이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음울한 이야기를 무려 석 장이나 기록하면서도 사무엘의 행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언약궤 이야기가 사무엘서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상관없이 전개되는 삽화적인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언약궤 사건은 궤와 성소, 그리고 의식 중심의 신앙 형태로 백성을 이끌던 제사장 엘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씀 중심으로 백성을 지도하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에 영적 각성이 일어나 새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언약궤 설화를 구약 가운데 가장 신학적 의미가 깊은 기록의 하나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설화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거나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매개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활동하시는 역사적 사건이 저자의 아무런 신학적 주석 없이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기대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나타나 행하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에 싸인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존귀하신 영광의 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외경을 품게 합니다. 성경공부하면서 성경에 대한 지식만 축적하고 성경이 애써 말하려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잠1:7) 지식의 근본을 놓친다면 우리가 바치는 시간과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이 겪은 국가 비상사태는 주로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서에만도 무려 13회의 충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의 사건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상징인 언약궤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찌하여 이런 재난이 임한 것입니까?

본래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했던 때와 거의 비슷한 BC 13세기경, 지중해의 그레데(옛 이름은 '갑돌' 암9:7, 현재의 사이프러스)와 다른 에게해 섬들로부터 들어온 일명 '바다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서남부 지중해 해변에 자리잡고 틈만 나면 동진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습니다. 바이킹족이나 일본같이 '바다의 백성'인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비해서 군사적으로 강력한 집단이어서 팔레스타인의 북부, 동부에 정착한 이스라엘을 추수 때마다 식량을 탈취하며 늘 괴롭혀왔습니다.

그동안 블레셋에서부터 구원해주던 사사 삼손은 가고(삿13~16장),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무려 4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 위기를 극복할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삼상4:3)

이스라엘 장로들은 국가 안보 문제뿐 아니라 심각한 신학적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승리 대신 패배를 맛보게 하셨는가 하는 패전의 원인 규명과 더불어 나온 해결책이 바로 언약궤를 가지고 전장에 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전에 들어오자, 이스라엘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목청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1차전의 승리에 취해 있던 블레셋의 전의를 꺾으려 했습니다.(4:5) 멀리 이스라엘 진영을 관찰하던 블레셋은 당시 지중해 세계가 익히 들어온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상기하며(4:8), 공포심을 극복하며 2차전에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당시 전쟁터에 나간 이스라엘이나 심지어 블레셋, 그리고 우리 독자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통쾌한 설욕전을 기대하겠지만, 그 결과는 전혀 예상밖의 대참패였습니다.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4:10~11)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심판을 집행한 것이었으므로 충격적인 내용은 아닙니다.(2:34) 그런데 궤까지 빼앗긴 것은 후에 그 소식을 들은 엘리와 비느하스 아내의 반응을 보더라도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민족적 재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지만 실상은 궤를 가지고 나간 장로들은 한결같이 미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미신이란 바른 신앙이 아닌 미혹된 신앙을 뜻합니다. 미혹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린' 상태라든지,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 헤매는' 모습을 말합니다. 장로들은 패전의 충격으로 겁을 먹어 갈피를 못 잡고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졌다면 이런 재난을 겪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먼저 재를 무릅쓰고 회개한 후에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었어야 했습니다.(신28:15, 25)

그들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이가 들자 어영부영 장로의 위치까지 올라간 한심스러운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상징(symbol)과 실재(reality)의 차이조차 구별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구원해주소서"라고 울부짖는 대신 "그것으로 우리를 ... 구원하게 하자"(4:3)라고 눈에 보이는 궤만 의지하고 전쟁을 앞두고 관례적으로 외치던 함성만 질렀던 것입니다.(민10:35)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마틴 부버(M. buber. 1878~1965)가 지적한 대로 '나와 당신'의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화 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종하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의 주권 아래 현실적 유익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그것'으로 이용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기복신앙 의 조상이라고나 할까요. 현대의 크리스천들도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궤 속에 구겨넣고 필요할 때만 신경 안정제 정도로 이용하는 미신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롬1:1)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복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엘리와 비느하스 아내의 최후

모세는 나이 120세에도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신34:7)다고 했는데, 엘리는 나이 98세에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했고'(4:15) 몸이 비둔하여 거동이 힘들었습니다.(4:18) 비록 형식적으로 40년째 엘리가 사사로 있었으나 '통치권의 누수현상'이 일어나 장로들이 재빨리 지도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의 지도력이 서지 못한 시기였으므로 일종의 과두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허락 없이 장로들이 궤를 전장터에 가지고 가자,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전쟁 소식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리고'(4:13) 있었습니다. 그는 참혹한 패전 소식을 듣자 그 충격으로 '자기 위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4:18) 죽었습니다. 엘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궤를 수호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 생애의 가장 큰 사명이요, 특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서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거세고 절망적이었는가를 저자는 비느하스의 아내를 통해 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이 이름 모를 여인의 신심이 얼마나 올곧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궤를 빼앗기고 시부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자 쇼크로 아들을 조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배가 불러올수록 만약에 사내 아니가 세상에 태어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언약궤 앞에 나아가 장차 조부와 부친의 대를 이어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고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게 될 부푼 꿈을 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상태에서 아들을 낳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지어준 후, 영광이 떠난 흑암의 땅 이스라엘을 하직했습니다. 겨우 첫 아들을 낳은 앳된 젊은 여자에게 궤가 이스라엘에서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신앙의 단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궤를 빼앗긴 것은 모든 것이 끝나버린 절마아 그것이었습니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4:22)

저자는 이런 비극적 사건을 읽는 우리에게 비느하스의 아내를 한나와 대조해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유는 젊은 비스하스 아내의 때아닌 죽음이나, 이가봇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나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 한번 못보고 자랄 아기의 운명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한나와 비느하스의 아내 같은 그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참으로 고상하고 감동적인 의식 수준은 우리의 가슴에 눈물을 흐르게 합니다.

한나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막힌 시대 환경 속에서도 죽는 순간까지 그들의 생애에서 최고, 최후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상하며 부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남편의 성공과 자녀의 좋은 대학 입학, 가족의 행복과 안일만이 유일한 관심이 되기 쉬운 여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명예와 민족의 역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한, 그 겨레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후에 열왕기서 저자는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상15:11)와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왕상16:25)라는 말로 행적을 평가하면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왕상14:21, 31)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왕상15:2, 10)

왕들의 신앙과 인격에 어머니가 끼치는 영향을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며 은연중에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이 수백, 수천 년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나와 비느하스의 아내 같은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들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외국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참 유대인이 되는 이스라엘의 특이한 전통은 수긍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신앙 지도자들의 잘못된 영향으로 이런 절망적인 표현을 했을 테지만, 하나님께서 이토록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어찌 당신의 영광을 영원히 거두실 수 있겠습니까.

이방 땅의 하나님 영광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5: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토록 자신의 영광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힘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묵인하셨다니, 믿어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역출애굽' 또는 '하나님의 포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바로를 강한 손으로 치시고 큰 영광을 나타내며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오신 하나님께서, 이방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관심을 두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명예의 상징인 궤가 이방 땅에 끌려가 굴욕을 당하는 것을 방관하실 수 있었을까요?

블레셋은 그 궤를 탈취해 개선하자 우쭐해졌습니다. 여시 우리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 야훼보다 우세하다고 사기 충전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속구기 되었듯이 그들의 신 야훼도 영락없이 다곤의 신하가 되었다고 흐뭇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5:2)

다곤은 본래 가나안 종교의 많은 신들 중에 '곡식의 신'으로 신봉되던 블레셋 사람들의 주신이었습니다.(삿6:23) 다곤 신상 곁에 놓여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역약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명예가 자기 백성의 배도로 참혹하게 더렵혀지고 있었습니다. 시편78편은 이 언약궤 사건을 하나님 편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소행을 보시고 노하셔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시고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세운 실로의 성막에서 떠나셨으며
그의 능력과 영광의 상징인 법궤를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시고 몹시 노하셔서
자기 백성을 원수들의 칼날에 죽게 하셨다....
그때 여화께서 자다가 깬 자같이
술 기운으로 깨어난 용사같이
일어나셔서 그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그들이 회복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하셨다.(시78:59~62, 65~66, 현대인의 성경)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다가 깬 자같이' 홀로 자신의 엄중한 손을 펴사(5:6, 9, 11) 자기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갈6:7)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리고 영광을 얻었던 블레셋이 당하는 수치 - 다시 반전의 역사가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넘어지면서 상대방을 넘어뜨린 후 꼼짝 못하게 굴복시키는 '업어치기'의 명수입니다.

궤 곁에 있던 다곤은 패전병이 무릎을 얼굴에 땅에 대고 언약궤 앞에 쓰러졌습니다. 다곤의 제사장들이 마치 넉다운되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로기 상태의 권투 선수를 간신히 일으키듯이 가까스로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그 결과는 더욱 치욕적이었습니다.

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 뚱이만 남았더라
(삼상5:4)

다곤을 숭배하던 블레셋 사람들의 경악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신의 우위 경쟁은 다곤의 KO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일 수 없고 모든 나라를 다스리며, 이방 세계에도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온 세계의 주인이심을 과시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블레셋에 임한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독한 종기가 생겨 고통 받다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무섭게 치시므로 그 성은 온통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도 악성 종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자 그 성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5:11~12, 현대인의 성경)

블레셋에게 포로처럼 굴욕을 당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일어나서 만군의 여호와로서 권능과 영광을 나타내신 이 사건은, 십자가의 치욕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영광을 얻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해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빌2:6~11)

이스라엘에 되돌아 온 궤

법궤가 차례로 옮겨갔던 블레셋의 주요 도시 아스돗, 가드 에그론의 주민들이 재앙으로 고통 당하게 되자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자고 합의하였습니다.(6: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상한다는 표현으로 독한 종기의 모양과 병을 옮기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던 쥐 모양을 금으로 다섯 개씩 만들어 속건제를 드렸습니다.(6:3~5) 그리고 새 수레 위에 궤를 싣고 송아지를 가진 젖소 둘로 수레를 끌고 당시 레위족이 살던 마을 벧세메스로 돌아가게 했습니다.(6:7~11) 7개월 만에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궤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른 아무 도움 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능한 손과 편 팔로'(겔20:33)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젖나는 어미 소들까지도 간섭하셔서 "음매"하고 울어대는 송아지들에게로 가지 않고 자연의 본능을 거스려 자기들의 창조주 하나님의 지시대로 벧세메스를 항하여 곧바로 가게 하셨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기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가니라(6:12)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다스리며 그 생각의 방향을 도랑물처럼 마음대로 바꾸십니다.(잠21: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잠16:9)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젖소들의 걸음까지 인도하십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웃어 넘길 익살로만 보기에는 신학적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주권과 통치는 선민 이스라엘과 애굽이나 블레셋 등 이방인 세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짐승들,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세계까지 예외없이 온 우주 만물에 미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1장에서 소개한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을 언야궤 설화를 통해 사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 설화의 주제는 '궤'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며 언약궤 사건이란 사실상 만군의 여호와 사건이었습니다.

언약궤가 되돌아오는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추수 때 노략당하지나 않을까 전전 긍긍하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저 멀리 블레셋 쪽에서 젖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마음을 졸이며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점점 다가오는 수레 위의 물체가 바로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임을 확인하자 기뻐 환호성을 쳤습니다.(6:13) 수레가 밭에 있는 큰 바위 곁에 멈추자 그 소들을 잡아 번제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6:14)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탄식하신 적이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 두 젖소는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친 수풀에 뿔이 걸려 있던 수양(창22:13)과, 첫 종려 주일에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나귀 새끼(막11:7~10)와 더불어 특별한 영예를 차지할 것입니다.

법궤를 맞으며 환호하던 벧세메스 사람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궤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민4:20) 궤 속을 들여다본 70명을 하나님께서 치심으로써 마치 블레셋에서처럼 애곡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6:5)고 말하던 블레셋의 제사장들만큼도 경외심 없는 벧세메스의 레위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궤는 아벡 전투에서 불타기 전 성소가 있던 실로 가까운 기럇여아림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20여 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사무엘을 통해 성소나 법궤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변화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잠시 법궤를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되돌아온 사건을 전후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와 그의 두 아들, 이스라엘 장로들, 벧세메스 사람들, 그리고 사회의 어느 계층에서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영적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고 만 것입니까? 말씀이 희귀하여졌으므로 바른 신앙을 잃어 버리고, 그 결과 자기들의 삶의 자리인 가나안의 여러 이방 신들을 섬기다가 점점 가나안 종교에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 전반의 종교 현상이나 사무엘서의 시대 정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가나안 종교와의 종교혼합현상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후에 열왕기서와 예언서의 중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며, 유다나 이스라엘도 이방 신 숭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공부를 위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 종교와의 종교 혼합 현상

동으로 현재 이라크 지역인 바벨론, 북쪽의 앗수리아, 서쪽으로 요단강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가나안 지역은 이른바 '초승달 모양의 옥토'라고 불리는 근동의 고대 문명 발상지입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가나안 문화는 농경 문화였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들어온 해양문화 중심의 블레셋이나 유목 문화 중심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이른바 타문화에 적응하려는 '문화변용'과 타문화에 흡수되는 '동화현상'을 빚어내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로마가 무력으로 희랍 세계를 지배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희랍인들의 수준 높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현상이나, 청이 명을 정복했으나 명나라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인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자주 블레셋의 지배 아래 살던 이스라엘은 순결한 야훼 신앙을 잃고 더욱 급속히 가나안 문화에 물들어갔던 것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다신교였고, 자연의 힘을 인격화시켜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신 바알은 '땅의 주'로서 농사에 필수 불가결한 비를 주관하며 곡식, 포도주, 기름을 제공해준다고 믿어지는 남성신이었습니다. 바알의 아내 '아스다롯'은 사랑과 다산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을 종교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겨울에 죽고 봄에 되살아나는 자연의 순환도 토지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남녀의 결합으로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를 자연세계에 연결시켜 풍년은 남신과 여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온다고 해석했습니다. 예배자들은 진탕 먹고 취한 후 성전에 있는 창녀나 미동과 광란의 춤을 추고 성행위를 하는 의식을 통해 그들의 신이 성적으로 결합하도록 자극시켜 풍년을 조작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가뭄에 먼저 땅에 물을 붓고 나서 자연산에게 제례를 드리는 마술적 미신 행위와 비슷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는 자연 조건이 불안한 가나안 땅에서 매우 실제적인 현실 안정과 번영이 약속되었고, 본능적 만족과 성적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고 편리한 종교였습니다. 비즈니스의 번영과 섹스의 종교인 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보니 그곳에 먼저 살고 있는 가나안의 여러 소도시 국가들은 풍성한 물질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알 숭배 덕분이라고 믿는 풍토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도 '선진국' 가나안의 신앙과 생활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야훼 신앙과 바알 숭배의 차이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과 가나안의 바알 숭배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째, 여호와는 역사의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하나님이신데, 가나안 종교는 매년 여름과 겨울의 순환에만 자기를 계시하는 자연신 숭배였습니다. 가나안 종교에는 출애굽 같은 역사적 구원 사건이나 아브라함과 언약하시는 인격적인 신도 없었습니다. 둘째, 야훼 신앙은 십계명을 비롯한 말씀으로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주고나하는 윤리적 신앙이지만, 가나안 종교는 그들이 성역 안에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만 유효한 지역화 된 신앙이며, 윤리 의식도 없었습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가나안 종교는 인간의 마술적인 의식 즉, 매임의식등을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등 종교의 특징은 역사 의식과 윤리 의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를 향한 좁은 길이 아니라 넓고 쉬우며 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미 그 위험을 아시고 이방신들을 두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과, 심지어 이방 신들과 결혼하지도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던 것입니다.(신7장)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는 전쟁 위기에 필요한 신이요, 농경 생활을 위해서는 바알 숭배가 필요하고 훨씬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가나안 종교의 신당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이 광란의 음행이 버젓이 제사장들에게 행해지고(2:22)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법궤가 장로들에게 이방 종교의 무슨 마술 상자처럼 취급당했습니다. 이 모든 근본 원인이 당시의 종교 혼합주의적 시대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앙적 위기 중의 위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는 것까지도 허용하는 기상 천외한 방법으로 극도로 혼탁해진 이스라엘의 신앙을 순결하게 하려 하셨고, 언약궤 사건 후 이스라엘이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바른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무엘을 준비시켜오신 것입니다.

때를 기다린 사무엘

사무엘이 처음에 궤를 빼앗긴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건까지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을 새롭게 하시려는 숨은 계획이 있음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도력이 당장 백성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을 알고 인내하며 이스라엘의 영적 갱인을 준비해온 것입니다. 사무엘의 준비 기간은 남들의 눈에는 각광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값진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사무엘이 무엇보다 힘쓴 것은 어머니 한나에게서 배운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의 고독한 영적 투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노래를 부름으로써만 노래를 배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응답받는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해갔습니다.(7:5, 15:23) 후에 이스라엘에 일어난 영적 부흥은 간절하고 오래 기도가 쌓인 후에야 능력 있게 일어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공적 활동이 없었던 침묵의 20년 동안 사무엘은 선지자 공동체를 세워 동역자를 얻고 제자를 양성하는 기초를 잡아 일생 동안 그 사역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구약학자 올브라이트(W. F. Albright)의 설명에 근거한 것인데, 사무엘서와 열왕기하에서 어렵기 않게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무리들'(삼상10:5, 19:20, 24, 왕상 20:35), '선지자의 생도들'(왕하2:3, 5), '선지자의 생도 50인'(왕하 2:7)들이 언급된 것을 보면 사무엘의 선지자 학교는 후대에 나단,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영맥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위한 예언자 전통을 창출해내었습니다.

선지자 무리들은 공동 생활을 했으며(왕하2:5, 4:38~44), 주로 성도들의 헌신적인 물질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왕하6:1~7). 사무엘은 말씀 운동을 일으키되 당대에만 그치는 일과성의 일이 아니라, 먼 후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어 하나님의 숨어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해갈 젊은 말씀의 종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안목을 '예언자적 통찰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비전을 가진 한 사람 ->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동지 -> 온 겨레에 미치는 영적 갱신'의 역사가 동심원의 파문을 일으키며 점차 이스라엘에 퍼져나간 것입니다.

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7:2)

오랫동안 이방 신을 섬기던 백성들 사이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말씀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서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더이상 살 길이 없다는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엘리트 그룹이나 특별지역에서만 일어난 움직임이 아닙니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는'(7:2)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일시적 쾌락은 있으나, 그 후에는 더 심한 괴로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시16:4)

이스라엘의 회개 운동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사무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엘리가 죽고 장로들의 영향력도 법궤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어 지도력의 공백 상태가 되었습니다. 7장은 사무엘의 사역을 요약한 기록입니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활동을 이렇게 짧은 지면만을 할애해 요약한 저자의 의도는 아마 다윗과 다윗 왕국 역사를 빨리 소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무엘의 사역은 그 역할이 서로 겹쳐지기 때문에 명확한 구분이 힘들지만 대강 나누자면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의 일, 기도하며 제사 드리는 대제사장의 일, 재판 행정과 국방을 책임지는 사사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신정 국가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 군사, 행정 전 분야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저자가 사무엘의 평생 활동을 요약하면서, 그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구하는 여러 분야 중에서 그 긴급성이나 중요도에 따라 어떤 편집 의도를 가지고 순서를 정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우선 순위는 첫째, 선지자의 사명, 둘째, 제사장의 사명, 셋째, 사사의 사명이었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교회나 국가 행정에도 분명한 우선 순위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바르게 한 후 이웃과 원수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명한 차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선 순위는 오늘날 주의 종들이나 교회가 무슨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인가를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맨 먼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덧입도록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7:3)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모든 계명의 기초가 되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는 제 1,2계명부터 거역한 죄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 가나안 종교의 이방 신들을 마치 여러 남자를 둔 음란한 여인처럼 왔다갔다 섬기는 것이 죄의 뿌리였습니다.

사무엘은 통렬하게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너희들이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 감정적인 후회만으로 거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지적 깨달음과 아울러 너의 집 방구석에 모셔둔 쇠붙이와 나무를 깎아 만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 상들을 제거하는 구체적이고 단호한 의지적 결단이 따라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회개로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없고 끊임없이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명합니다. '마음'이란 사람의 인격과 충성의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구약에서 858번이나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딴 것에 도둑맞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길 원하십니다. 백성들이 이방 신상은 제거했으나 만약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전에서 벌어질 죄악의 즐거움이 늘 마음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순결한 마음을 원하십니다.(마5:8) 그래서 다윗이 늘 힘쓴 것이 있습니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8)

하나님의 백성은 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습관이 형성되기까지 스스로 '마음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사무엘은 분몀ㅇ히 깨우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월성을 증거함으로써 이방 신들을 제거하도록 도전한 후, 하나님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과 자기 백성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충분성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강력한 선지자의 말씀 앞에 그토록 아끼며 내어놓기 싫어하던 이방 신들을 꺼내어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삼상7:4)

이것은 마치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과 같이 완악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으로 무너진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고후10:4)

그후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약 13km 떨어진 미스바에 소집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온 백성들은 자기들의죄를 애통하며 금식하고 '물붓는 예식'을 행했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7:6)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즉각적으로 온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영적 부흥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회복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난 회개 운동의 열매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종속되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블레셋에 '큰 우레' 미사일을 퍼부으셔서 감격적인 해방을 안겨주셨습니다.(삼상7:8~11)

사무엘은 반드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시34:4~6)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에벤에셀' 즉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7:12)는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순수한 야훼 신앙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잃었던 주권과 영토의 회복으로 참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역사가 한나의 기도,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3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무엘상7:13~14)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들도 섬기며 혼합 종교적인 세속 문화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그들은 정신적 정치적으로 이방에 종속되어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와 굴욕의 시절이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한 회개 운동으로 신앙의 혼합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 신앙을 회복했을 때에야, 소금이 제 맛을 내듯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새 이스라엘'인 기독교회의 역사도 이방 신들의 지배로부터 성경에 계시된 순수한 복음 신앙을 지키기 위한 투쟁사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는 이집트와 바벨론 종교에서 들어온 신비적이고 의식적 요소, 희랍 문화의 인본주의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에서 나온 합리주의 요소, 로마의 영향으로 들어온 물질 문화 등으로 뒤죽박죽되어 천여 년 동안 '혼합 종교'가 되어 있었습니다.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목표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기독교회 안에서 성경 이외의 것으로 가감된 이방 종교나 철학, 세속적 문화 요소나 전통을 가려내고 이것들을 과감히 제거하여 바른 복음 신앙을 되찾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속 문화의 영향에서 차단된 무풍지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고 표현했듯이 현대 교회도 이방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바르게 알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며, 방 안의 먼지를 닦아내듯 우리의 내면과 교회 안에 잠입한 이방신들의 바이러스 병균을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신앙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개인 신앙과 교회를 상대화시켜 비성경적인 요소를 바로잡아가는 신앙 태도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

현대와 같이 다원화되고 상대적인 시대 상황에서 기독교의 유일성, 절대성을 붙잡고 성경 중심의 복음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몹시 진부하게 보입니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 아닌가,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주장은 독선이 아닌가 하고 항의하는 시대 분위기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은 주로 배타주의적인 태도였습니다 기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사단을 숭배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와는 대화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절대성 주장은 광신적이며 식민주의적 태도라고 비난하면서 일반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실재에 대한 규정 내용과 의식 등 표현 방법이 다를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모두 한 신에게로 이끌어가고 구원을 주는 것이므로 그 다원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선교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한국에서도 유동식 교수 등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발맞추어 가톨릭에서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분수령으로 종교적 포용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배타주의와 다원주의의 중간 위치의 입장으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도 자기 종교의 비교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를 다루는 종교 신학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일반화시키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르므로 여기서 깊이 다루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크리스천들은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흔적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의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 종교에 갇혀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겨야겠지만, 그 종교의 틀은 단호히 부인해야 하는 것이 의심할여지 없는 성경의 주장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나 충분성, 복음의 독특성과 보편성까지 타협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걷잡을 수 없는 절충주의나 종교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화의 길이요, 자기 포기 선언입니다. 근대 기독교와 동양의 신비 종교 등을 종합하여 혼합 종교를 만들자는 이른바 새시대 운동(New Age Movement", 한국 신학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변선환 교수의 주장이나 대학가에 유행하는 증산교, 등의 교리도 종교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를 선호하는 시대 분위기를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 내부에 침투해서 순수 복음을 혼란시키거나 잠식하고 있는 샤머니즘, 유불선 등의 전통적인 이방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지적 영적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뿐 아니라, 현대의 종교 신학의 악영향에서 바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방을 제거하는 이스라엘

현대는 사는 크리스천들은 사무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하나님 백성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졌는지 모릅니다. 이방 신들이 눈에 보이는 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사상과 생활 양식 속에 교묘하게 누룩처럼 들어와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유사한 이단 종파, 사단 숭배나 타종교의 영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속주의적인 세계관과 생활 양식입니다.

어느 학자가 무신론, 불가지론, 회의론이나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실존주의까지 이방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또한, '탐심', 즉 절제를 모르는 과도한 소유욕, 끊임없는 3S(Screen, Sex, Sports)의 쾌락 추구도 이방 신 숭배일 수 있습니다.(골3: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유형, 무형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신랑이 신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하듯이 우리 마음을 독차지하기 원하시는 '질투 하는 하나님'이십니다.(출20:5) 가나안 종교와 종교 혼합의 영적 위기에 놓여 있던 자기 백성에게 사무엘을 통해 이방 신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되찾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 모세와 백성들이 드린 감격의 찬양을 변함 없이 받기를 원하십니다.

11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하나님께서는 이방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쉬운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도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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