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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상 13~15장 _ 버림 받은 사울

by 비앤피 2022.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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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15:22~23)

초대 왕으로 세움 받아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사울이 그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의 실패는 개인적으로 비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원인이 됩니다. 

사울은 블레셋 그리고 아말텍과의 전쟁 등 밖에 있는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거듭 패배했습니다. 저자는 사울의 군사적 승리와 왕으로서의 치적보다는 12장 14-15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를 배경으로 주로 그의 신앙적 파탄을 집중 추적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지도자의 내면적인 자기 관리가 무슨 외형적인 업적을 성취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가를 깨우쳐 줍니다. 사울왕의 통치는 형식적으로 사무엘상 31장까지 계속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본문에서 이미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실을 가슴 아프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패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결코 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한때 사관학교에서 한국사과목을 아예 빼어버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면서 신앙적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음은 앞날을 위해 실로 값진 것입니다.

사울이 처한 특수 상황

사울이 왕위에 오른지 2년 후 블레셋과의 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힘의 절대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무서운 위협이 되었습니다. 첫째, 블레셋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장소마다 미리 ‘수비대’ (13:3)를 주둔시켜놓고 자기들이 원하면 언제나 기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이스라엘 영토의 한 복판에 있는 믹마스까지 와서 진을 치고(13:5)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둘째,블레셋은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5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삼상13:5)

현대전의 탱크에 견줄 수 있는 병거가 3만,장갑차에 비할 수 있는 마병이 6천 명 , 그리고 보병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당사 전체 인구는 이스라엘이 더 많았다고 하지만,상비군은 겨우 3천 명밖에 안 되었고 더구나 도망병이 많이 생겨 간신히 600명의 군사가 남아 있었으니(13:15) 중과부적 (衆寡不敵)이었습니다 (13:2).

셋째,블레셋은 고도로 발달된 철무기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13:19~23).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전쟁 무기라고는 기껏해야 활과 투석기(投건機)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블레셋은 일찍이 헷족속의 철기 문화를 익혀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후 신무기를 많이 개발한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미국 앞의 이라크보다 더 보잘것없는 무기로 싸우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이라는 무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11장에서 본 대로 암몬을 물리치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합니다. 점점 증강되는 블레셋의 병력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전쟁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6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삼상13:6~7)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 상황에서 사울이 왕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우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전투에 임하기 전에 승리를 보장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병사들이 여자와 성관계를 가짐으로 인해 부정하지 말아야 했고(21:4 이하 참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직접 드리거나 제사장 임석(臨席) 아래 왕이 드릴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정치적인 면에서 통치권을 가진 왕으로 세우면서도 종교적인 면에서의 지도력만은 자신이 확고히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사울에게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칠 때까지 7일을 기다리라’고 명했습니다.

사울은 극한적인 특수 상황을 만나 몹시 당황하고 다급해졌습니다. 적은 언제든지 침공해올 수도 있었고,아군 병사들은 전쟁을 포기하고 흩어지며 도망가는 수가 날로 늘어갔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병사들이 남아 있을 때 얼른 제사를 드리고 싸우러 나가야겠는데,온다고 약속한 사무엘이 무작정 지체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사울은 사무엘이 오겠다고 약속한 7일째, 남은 몇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번제를 드리고 말았습니다(13:8-9).

마지막을 참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때로 기도 응답을 늦추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절박한 형편에서 행한 사울의 행위를 충분히 동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의 명령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일 뿐 아니라, 왕이면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월권을 행한 심각한 범죄 행위였습니다(민18:5).

망령된 처음 불순종

번제를 마치자마자 도착한 사무엘은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하고 추궁했습니다. 이때 사울은 뭐라고 변명합니까?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삼상13:11~12)

11-12절의 사울의 핑계를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사울은 현실적 상황을 넘어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없었습니다. 이때 문제는 크게 보이고 높고 크신 하나님은 작고 희미해집니다. 동전 하나가 눈동자가까이 있으면 태양& 가릴 수 있는 법입니다.

사울은 오직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과 환경만을 보고 자기가 택할 행동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는 흩어지는 백성 , 오지 않는 사무엘,적군의 집결만 보였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 ‘내가 이르기를’, ‘부득이하여', 즉 자기 생각과 감정을 따라 결정했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 , 그리고 어떤 공동체가 윤리적 선택을 할 때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인 “하나님의 법도를 따른다’는 원칙이 확고하지 않을 때 상황윤리자(狀況<_)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정상 참작만 하고 규범이 없다면 사람들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각자 자기 소견에 따라 행하다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사울의 말은 상황 윤리에 호소하여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내용이었습니다. 상황 윤리는 1966년 조셉 플레춰 (Joseph Fletcher)가 쓴 책의 이름으로 대중화된 것이지만 사실은 사울왕을 비롯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범죄 속에서 사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상황 윤리자들의 주장이 모두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기독교 윤리에서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성과 고루한 전통이나 교리,또는 제도보다사랑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한 점은 그들의 공헌이라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의 보편 타당성과 영원 불변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다만 그 상황에서 사랑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계명을 범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십계명의 계명 하나하나를 부득이하여’ 어길 수밖에 없는 특수 상황의 경우를 예로 들면 사랑하니까 살인하고, 사랑하니까 간음하고,사랑하니까 도적질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현대의 상대주의 철학을 기독교 윤리학에 도입한 것이어서 현대인의 사고의 경향에 맞고 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 (고전 13:6)이 아닌 불의를 기뻐하는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도 없고,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늘 하는 대로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부분적으로 선택해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은 결코 상황 윤리를 추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하나님을 순종하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그때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자기 죄를 합리화하려는 상황 윤리자가 아니었던가 곰곰이 돌이켜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시인하는 진실을 원하시지,사울처럼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요일1:8-10).

또한 그 상황에서는 아주 시급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보이는 문제일지라도,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오는 것이 예사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한 결정일수록 충분한 기도와 묵상, 토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이라고 확신하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후,그 때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 시간이 흐른 후 재검토할 때 얼마나 어리석고 하나님을 슬프게 한 것이었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확신이란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래서 국회도 법원도 절차를 밟아 신중하게 입법 행위나 재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에서야 얼마나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을 존중하여 매사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까. 조급함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증거입니다(딤후 3:4).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상황만 보고 다급해져 그냥 서둘러 결정한 치명적 선택이 사울 개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그리고 민족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향해 하나님의 종 사무엘의 책망을 들어보십시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삼상13:13)

사울을망령된짓을행했다고꾸짖었습니다. ‘망령되다라는 것은 어리석다 라는 뜻인데,그렇다면 사울의 IQ가 80 이하란 말입니까? 성경에서는 지적인 면과 상관없이 신앙적 도덕적인 과오를 모두 어리석다고 봅니다. 지식과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7). 지혜는 성경 말씀대로 행하며(시 119:98400),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왕상 3:9, 약 1:5).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리석어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면 우매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계시 의존적인 사고(思考)’ 를 해야만 참 지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이 빚어낸 결과는 가혹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삼상13:13~14)

사울 왕조는 사울 당대로 마치게 되었고,하나님께서는 사울에 이어 왕이 될 자를 이미 택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어법을 ‘예언자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 이라고 합니다. 사울을 계승할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A man after his own heart)' 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 설교 중에서 다윗을 가리켜 한 말은 여기에서 인용한 것입니다(행 13:21-22).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이 단한번 행한 범죄를 왜 이토록 단호하게 벌하시는 것일까요? 마치 사도행전 역사 초기에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가혹하게 심판하여 모든 교회에 경고하셨던 사건과 비숫합니다(행 5장).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나,때로는 그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시점의 중요성에 비추어 특수하게 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요나단의 기습작전

대치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블레셋은 특공대를 보내는 등 이스라엘을 위협했으나 사울은 무대책으로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2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삼상14:2)

사울과 함께한 600명은 블레셋군에 비해 초라한 병력이었으나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용사들이라면 무한한 가능성의 군사이기도 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메뚜기떼같아 몰려오는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를 사울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삿 7장). 그러나 믿음이 없어 석류나무 아래 사령부를 두고 아무 대책 없이 지체하는 사울은 한없이 처 량한 지도자였습니다.

이때 전선의 교착 상태를 깨고 나타난 영웅이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는 부왕의 불신앙이 답답했든지,아니면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아버지와 의논 없이 호위병 단 한 명만 데리고 적진으로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6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

요나단의 적군을 바라보는 눈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증강된 병력,발달된 무기만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의 눈에 비친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 상관없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구원이 사람 수와 관계없이 절대적인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축구 시합에도 한두 사람의 ‘스트라이커’ 가 있어야 하듯이,요나단과 그의 호위병 두명이 이스라엘의 작전을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요나단의 기습으로 혼쭐난 블레셋 진영은 자기들끼리 치고 받다가 마침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울과 병사들,에브라임 산간지에 피난가서 숨어 있던 백성들까지 다시 모여 도망가는 블레셋군을 추격하기시작했습니다 (14:14-22).

23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 벧아웬을 지나니라(삼상14:23)

그렇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어떠한 공동체가 위기에서 구원받는 길은 요나단과 같이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음을 굳게 믿고 싸우는 용기 있는 한두 사람의 존재에 있습니다.

온 백성을 피곤케 한 사울

이스라엘은 블레셋군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사울 왕은 전투에 임하는 군사들에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맹세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24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삼상14:24)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의 사기이고,우선 잘 먹어야 사기가 오르는 법입니다. 사울은 전에 보여주던 겸손은 어디로 갔는지 왕이 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폭군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섬멸하기까지 전군 단식령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젊은 병사들이라도 배고픈 채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14장에는 괴곤하다 ‘곤란하다 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14:24, 28, 29, 31). 요나단은 블레셋을 할례받지 않은 자로 보았으나 사울은 단지 내 원수로 보았습니다. 자기 체면이 백성의 복지보다 더 중요하게 보일 만큼 자기 중심적이고 충동적인 전제 군주의 모습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복수심은 사람의 정상적 판단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결국 공비 토벌 작전을 하듯 블레셋을 소탕하려고 죽을 힘을 다하던 이스라엘 군사들은 너무나 허기진 나머지 전리품 중에서 짐승들을 끌어내 잡아 피채 먹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노아시대부터 짐승을 피채 먹지 못하게 규례를 주어 생명 경외 사상을 심으셨는데(창9:4), 이스라엘 군사들은 큰 범죄에 빠진 것입니다(레 7:26-27).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고 백성들의 안녕에 대한 관심도 없는 교만해진 지도자의 경솔한 명령 한 마디가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빚었습니다. 악한 지도자나 지도자 집단이 공의를 떠나 악법을 만들고 자기들의 권세욕이나 복수심의 노예가 될 때 백성들의 인권은 유린당하며 고통 당할 뿐 아니라,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히틀러나 스

탈린 치하의 백성들, 군사 독재 정권 하의 한국 백성들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악법(惡法)으로 사회 구조 자체가 죄악된 경우, 그런 악법에 굴종하는 것은 신앙인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요나단을 구한 백성의 항거

사울은 백성의 속죄를 위해 생애 처음으로 단을 쌓았습니다(14:35).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나단이 기습 작전을 펴기 위해 먼저 블레셋 진영에 떠났었기 때문에 사울의 맹세를 듣지 못하고 그만 수풀에 있는 토종꿀을 찍어 먹었습니다. 그의 죄가 발각되자 사울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날의 승리의 주역인 아들 요나단을 사형 집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39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삼상14:39)

여기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사울왕이 "그거 뭐 없었던 일로 합시다’라고 하면 모두끝날 텐데, 왜 그 맹세를 지키려고 이렇게 소동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라고 명하신 적은 없었지만,맹세했으면 손익(損益)을 불문하고 반드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레5:4, 민30장). 특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면 그 이름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언행에 신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나 사울이 맹세를 지키려고 요나단을 죽이려 하자 백성들은 그 부당한 처사에 단호히 항거했습니다.

45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삼상14:4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가 되어 폭군의 횡포에 정치적으로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른바 '시민 불복종 운동'의 모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합된 '민중의 힘 ’으로 사울왕의 폭정에 항거하여 요나단을 구했습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명합니다(롬 13장).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질서를위해 왕에게 그권위를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세가 더 고차적인 권위인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행4:19) 정치 권세에 불복종하고 때로는 항거해야 할 예외적인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불의에 항거할 줄 모르는 백성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자격이 없는 노예들과 같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I960년대에 미국 흑인들의 민권 운동을 주도해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동적으로 악을 받아들이는 자는 악의 영속을 돕는 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악을 향한 아무 저항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실로 협력하는 자다. 피압박 민중이 그들이 받는 압제를 즐겨 받아들일 때 그들은 압제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구실을 맡고 있는 셈이다.”

어느 외국의 사학자가 조선 50CM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한국인에게 “한 왕조를 500년이나 질질 끈 국민들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3 • 1운동의 34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우던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인이여,부패와 싸우는 백성이 되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겠습니까.

물론 이런 외국인들의 비판은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지만 우리의 정치나 경제계뿐 아니라 교육계, 법조계, 종교계까지 온통 사회가 부패한 이유는 우리 백성 , 특히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람에게 불순종할 줄도 아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는 말은 없어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정치적 항거에 대해서는신학적 입장이 다양하고 그 폭이 넓습니다. 크게 나누어 킹 목사의 저항적 태도와 요더 (j. H. ¥)der)의 무저항적 태도가 있으며, 또한 저항의 형태로 비폭력적이어야 하는가, 폭력도 사용할 수 있는 가등의 입장이 나누어집니다.

프란시스 쉐퍼 (F. A. Schaefer)는 「그리스도인의 선언(A Christian Manifesto)」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로서는 광범위하고 과격하다고 볼 수 있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는 종교 개혁이 성공한 유럽 국가들은 폭력도 사용한 국가였다는 역사적 증거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자들의 “정치 권력자들이 성경에 배치된 통치를 할 때 백성은 반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라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에서 참 크리스천들은 히틀러를 지지했던 국교도들이 아니라, 국법을 어기면서 유대인들을 숨겨준 고백 교회 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래 미국에서 이른바 ‘구출 운동(Rescue movement)' 이라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해서 생명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병원의 낙태 수술실을 파괴하다가 3만 6천 명 이상의 크리스천들이 투옥된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의 횡포에 항거하여 요나단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아말렉 진멸 명령

14장 47~48절에는 사울의 군사적 업적을,49~51절에는 사울의 가족에 대해 요약해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군사 안보에 많은 관심을 두어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으면서’ (14:52) 지난번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겪은 곤욕스런 경험을 거울 삼아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사울왕은 영적인 자기 점검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동행하는 신앙 생활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선언을 받고서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발견하고자 영적으로 투쟁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자기 신앙의 위기를 의식하는 영적 감각이 마비된 상태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솔하게 사울이 단지 한 번 불순종했는데 그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신앙이 보이지 않고, 왕이 된 후 점점 교만해져서 갈수록 하나님을 찾는 삶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대상 10:13-14 참조).

긍훌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영적으로 둔하여 답답한 사울이었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크게 방해하고 끊임없이 괴롭혀온 아말텍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여 그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출 17장, 신25:17 이하 참조). 선지자사무엘은 “여호와께서 …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5:1)라고 사울의 마음을 준비시키며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15:2~3)

아말텍을 치되 ‘젖먹는아이’들까지모조리죽이라는잔인한 명령은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신앙의 걸림이 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한 생명을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도 충돌하는 신학적인 난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텍을 진멸하라는 것은 2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오는 길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피곤하여 뒤에 처진 노약자,부녀자들을 무참하게 몰살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집행이었습니다(출 17:8-13, 신 25:17-19).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들을 진멸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므로 원수들을 제물로 온전히 바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진멸’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전리품으로 온전히 바쳐진다’ 는 종교적 봉사의 뜻이 있는특별 용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룩한 전쟁(holy war)’이요, 성스러운 의무였습니다(신 20장)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본문에서 사울에게 아말텍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이방 족속들에게 이런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까?

첫째,음란한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가나안 족속이나 아말텍이 극심한 도덕적, 성적 부패로 사실상 멸종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장 참조). 최근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젖 먹는 아이들까지 에이즈에 감염되어 수많은 부족들이 멸종하는 것을 보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의 도덕 질서를 위해 선민뿐 아니라 다른 민족도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면 반드시 심판하시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둘째,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속의 계획을 점진적으로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먼저 이스라엘을 신앙적 도덕적으로,거룩한 백성’ 삼으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우선 이스라엘을 실족시킬 위험이 있는 사악한 민족을 진멸시켜야 할 역사적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전쟁

 

구약 시대의 거룩한 전쟁’ 개념은신약 시대에 와서 영적 싸움의 개념으로발전했을뿐아니라(엡 6:10-20), 교회 역사를통해 콘스탄틴 대제 때부터 시작하여 이미 4~5세기에는 '정의의 전쟁(Just War)’ 이론으로 정립되고 발전해나갔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악을 정복하고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차악(次惡, the lesser evil)' 으로서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 ‘십자군’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전쟁’ 이념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다가 기독교회에 많은 폐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 시대에는 전쟁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습니다.루터나 성공회는 가톨릭교와 함께 정의의전쟁’ 입장, 개혁 교회는 ‘십자군’ 의 이상을강조하는 입장,재침례파와퀘이커교는 평화주의 (pacifism)’ 입장이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교파에 따라그 입장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은 불법이요,유일한 합법적 전쟁은UN의 경찰 행위에 의해 참략자를 응징하는 전쟁이어야 한다는 헌장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전쟁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태도는 이렇게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므로, 우리는 구약의 어느 한 부분에 근거해 교리를 형성하는 위험을 인식하고,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신학적 논구(論究)가 필요합니다.

다시 불순종하는 사울왕

재기의 기회를 얻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 진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첫 순종 시험에 낙방한 사울이 안타깝게도 두번째 명령에 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심히 슬프게 하고 하나님의 종사무엘을 비탄에 빠지게 합니다.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15:7~9)

사울의 불순종은 무지나 연약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의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 (15:11)이라고 하셨는데 사울은 왜 거듭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것일까요?

첫째,탐심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무가치하고 쓸모 없는 것은 없애고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값나가는 것은 남겼습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 남겨두는 것은 늘 하나님의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점은 어떻게 자기 아들 요나단까지도 죽이려던 사울이 끔찍한 악행을 해온 아각왕은 살려두는가 하는 것입니다(15:33). 당시 관례대로 거액의 보석금을 노리고 계산한 행위가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영광만을 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제를 드리기보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15:12) 있습니다. 사울은 후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나서야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습니다.

30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삼상15:30)

그가 자기를 높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으며 얼마나 초라할 만큼 왕권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엾은 모습입니다. 교만이 그를 패망시키고 있습니다.

셋째,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단호하게 지적하는 사무엘 앞에서 사울은 자기 마음을 열고 고백했습니다.

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할 때 빌라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됩니다(막15:15). 탐심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의 여부가 바로 믿음의 시금석일 것입니다.

사무엘의 준엄한 책망을 받고 사울은 자기 죄를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물론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죄사함은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30절에 나타난사울의 태도를 보면 그의 죄 고백이 진정한 회개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왕으로서 섬기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박탈당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이유는 그가먼저 하나님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롬 1:28).

사무엘은 두 차례나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철저히 사울 자신의 선택의 결과이며, 사울자신의 책임입니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어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15:23, 26).

제자보다 순종을

아말렉을 다 진멸하지 않은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온’ (15:21)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사울에게 선지자 사무엘은 말했습니다.

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15:22~23)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담겨져 있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말씀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창하게 제사를 드리는 외적 형식적 행위보다 우리의 중심을 바라보시며(시51:6-7),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적인 생활의 전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짐승이나 물건을 제사로 바치기보다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 (롬12:1)로 드리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식 중심,사업 중심의 교회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참 교회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성공한 목회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순종하는 종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면서도, 제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 의식만 잘 지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신앙의 표현으로 오해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줄기차게 예언자들로 하여금 행함 없는 죽은 믿음으로 종교 행위에만 열중하고 윤리 의식이 빠진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통렬하게 책망허셨습니다(사1:11-20, 암4:4~5, 5:21-24). BC 730년대에 활동한 선지자 미가는 삯을 위하여 교훈하는 제사장들과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재앙의 심판이 다가오는데도,평안하다고 부담없이 믿으라고 하던 예언자들(미3:11)의 악영향으로 온 유다가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7내가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간다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실까? 내 허물 영혼의 죄를 위해 내  열매 맏아들을 바칠까?
8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그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
(미6:7~8)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의 삶이 없는 개인이나,기독교 윤리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의 성품을 바꾸거나 변개(變改)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15:29). 한때 기독교 국가였다가 회교도에게 영토를 빼앗긴 북아프리카와 중동국가들,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동유럽의 교회들은 모두 종교 의식은 화려하고 정교하며 열심이었으나, 말씀에 구체적 순종이 없어 항상부자편에만 서다가 개인과 사회 윤리가 심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민족에게 버림 받은 교회들이었습니다(렘7:28-29 참조). 교회가 세상의 소금으로서 그 맛을 잃으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마 5:13)이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성취된 것입니다.

순종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구속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과 구원받아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책임 있는 존재인 인간들 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신앙의 핵심적 표현입니다. 순종은 내가 내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는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현실적인 면에서 희생이 따릅니다. 사울도 현실적 손해를 감당 못하고 자기 불순종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제물을 더 바쳐 보상하려는 자기 기만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일시적으로 사람에게서 버림 받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버림 받을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로 하나님께 택함 받는 길을 택하셨습니다(벧전 2:4-8). 우리 주님은 사울같이 왕노릇하든지 아니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 (마7:22)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교만하고 거짓된 자들, 사기치는 목사들, 커닝하는 신학생들, 음란한 평신도들, 모든 윤리 의식 없는 가증한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7:23)라고 천국에서 쫓아내어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도록 버리십니다. 개인과 교회,민족 공동체가 하나님께 버림 받지 않으려면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할말씀이 있습니다.

21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마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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