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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상 16~17장 _다윗과 골리앗

by 비앤피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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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45다윗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6장의 중심 내용은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후 골리앗을 물리치는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16장부터는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울도 31장까지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다윗의 조연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6_31장을 흔히 ‘다윗 등장의 역사(History of David' s Rise)' 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은 예기치 않은 굴곡과 뒤틀림 등으로 파란 만장하지만,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까지 이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외모보다 속마음

그동안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사실을 선포한 후 조용히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생을 바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했으나, 그의 노년은 슬픔에 젖은 황혼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새 일을 맡기십니다.

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16:1)

슬픈 감정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무엘이 딴 사람을 왕으로 세우러 간다는 정보가 사울왕에게 새어 들어가면 죽임을 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감정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의 일생은 불순종하는 사울과 대조되는 순종의 삶입니다. 그가 무슨 창조적 사상,큰 프로젝트를 가지고 엄청난 사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위대한 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지시를 단순하게 순종하는 생애라는 점에 그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하여 하나님께 택하신 자를 기름부으려 할 때 그는 사울을 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외모에 눈길이 갔습니다. 엘리압의 훤칠한 키,당당한 체구,영화 배우같이 생긴 멋진 얼굴을 보자 "아하, 이 친구겠지!” 하고 기름 뿔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라 사람의 중심(仲心,heart), 곧 속마음을 보십니다. 내면성, 그 인격을 보십니다. 사람이 사람들 앞에 나가기 위해 외모를 다듬듯이, 속마음을깨끗하고 보배롭게 단장한다면 사람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향기로워지겠습니까. 그러므로 키가 작고 외모 가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아도 콤플렉스를 가질필요가 없습니다. 런던 동쪽 웨슬리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침대를 보면, 18세기 영국을 살린 부훙 운동의 지도자, 웨슬리가 얼마나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목동 다윗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물은 이새의 막때로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이었습니다. 이새는 유다 지파 가운데 유력한 가문에 속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증손자로 첫 부인과의 사이에 일곱 아들이 있었고,암몬족 나하스왕의 전처 아니면 첩인 여자와 노년에 결혼하여 다윗을 낳았습니다. 후에 등장하는 스루야라 아비가일은 이복 누이고, 아비새와 요압은 스루야리 아들들인데 그는 나이든조카들과 함께 자랐습니다(대상2:12-17). 사춘기 때 다윗은 이복 형들의 구박 속에서 성격이 비뚤고 거칠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겸손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13:14). 환경문제가 아닌 신앙의 유무가 인격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지도자는 만들어지기 앞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다윗은 외모나 재능면에서도 지도자감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12그래서 이새는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는데 그는 혈색이 좋고 눈에는 총기가 넘쳐흐르는 잘 생긴 소년이었다. 이때 여호와께서 "이 소년이 내가 말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삼상16:12, 현대인의 성경)
18신하 중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사람의 아들이 있는데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기백 있고 용감하며 구변 좋고 용모도 아름다운 데다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삼상16:18, 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가족의 제사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막내였지만 맡은 일에 성실했습니다. 그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되기까지 적은 양무리부터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양치며 틈틈이 수금타는 법을 익혔고, 돌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는 물매질 기술을 배웠으며, 곰과 사자와 싸우는 무술도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시를 썼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1~2)

다윗은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약 큰 아들로만, 태어났더라면’ '예루살렘의 명문 학교를 나왔어야 하는ㄴ데' 하며 운명을 탓하고 허송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재능과 기회를 살려서 자신을 개발하며 현재할 수 있는 작은 일 - 목동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눅 16:10)된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다윗은 허망한 백일몽만 꾸지 않고 착실하게 인생의 기초를 닦는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남께서는 다윗이 도착하자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16:12)고 명하셨습니다.

13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온 백성 앞에서 대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 받음'은 특별한 직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여 능력과 권세를 덧입혀주시는 예식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자 다윗은 성령님에 사로잡혔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다양하고 풍성하지만 지도자에게 주시는 대표적인 은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딤후 1:7)입니다.

사울의 경호원이 된 음악가 다윗

사울은 나이가 들수록 발작적인 정신 신경 질환에 시달립니다. 우울증, 질투심, 피해 의식에서 오는 과대 망상증, 복수심 등 복합적인 심리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에 나타난 사울에 대해 정신 분석학적 접근 방법으로 주해서를 쓴 정신과 의사들이 있을 정도입니다.아마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은 죄 의식과 소외 의식이 그를 괴롭힌 것 같습니다. 왕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다 누리면서도 그 영혼에 평화가 없는 사울은 불행한 인생을 보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쓰는 학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그의 증세와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은 자유함과 평화입니다. 반면에 악령이 우리 내면을 장악하면 자아를 상실한 채 두려움과 얽매임에 빠집니다(롬 8:15). 사울의 번뇌의 원인은 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란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한 영을 내려보내신다는 걸까요? 이것을 하나님 자신이 악하거나 악을 행하신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악의 근원인 사단과 그하수인들인 악령의 활동까지도 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악을 사용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희랍적 논리와 히브리 사상의 마찰을 보게 됩니다. 희랍 철학에서 상반되는 것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둘다 참일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히브리 사상은 상반되는 것도 둘다 참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때로 악까지도 하나님께서 궁극적 선을 이루기 위해 허용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창 50:19, 사45:7, 암3:6 참조). 이 역설적 진리는 희랍 철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서구식 교육에 세뇌된 우리들이 무엇보다 성경 연구, 동양 사상 연구,역사 연구 등을 통해 바른 이해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욥2:10, 사45:7, 암3:6 참조). 우리는 앞으로 사울이 악신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귀한 신앙 훈련을 받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경호원으로 임명받아 궁전에 불려갑니다. 그리고 사울이 번뇌할 때마다 수금을 뜯으며 음악 요법으로 사울의 정신병 치료를 돕습니다. 좋은 음악,특히 찬송은 우리의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23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23)

여기서 다시 확인되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인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준비시킨다는 준비의 원칙입니다. 사울은 아무 훈련 없이 중책을 맡았다가 즉시 교만해져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학문과 무예로 지도자 훈련을 시킨 후에야 출애굽 역사를 이루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첫 임무를 왕실에서 맡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양이나 치던 목동 다윗이 ‘제왕학입문(帝王學入門)’ 코스에 들어가 사울 아래서 국정도 배우고 외국 대사들도 눈여겨 보면서 왕 후보생 훈련을 받게된 것입니다.

골리앗의 도전

너희 사울의 졸개들아, 이 블레셋 장수와 맞서 싸울 자를 골라 이리로 내려 보내라. 만약 그 자가 나한레 이겨서 나를 쳐죽이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될 터이나, 내가

8나서서 그는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고함을 질렀다. "전열을 갖추어가지고 나오면 어쩌겠다는 말이냐? 너희 사울의 졸개들아, 이 불레셋 장수와 맞서 싸울 자를 골라 이리로 내려보내라.
9만약 그자가 나한테 이겨서 나를 쳐죽이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될 터이나, 내가 이겨서 그자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겨야 한다."
10그리고 나서 그 불레셋 장수는 다시 소리쳤다. "내가 오늘 이렇게 너희 이스라엘 진영에 욕을 퍼붓는데도, 나와 결판을 낼 사람을 내보내지 못하겠느냐?"
(삼상17:8~10, 공동번역)

엘라 계곡 전선에서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의 고함은 산과 골짜기에 메아리 치는 산울림과 함께 전율을 느끼게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원 세상에,어떻게 저런 거인이 다 있담!” 키 3m의 거구, 놋투구에 57kg이나 되는 놋갑옷,놋각반,놋창으로 무장한 장수 골리앗의 위협은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와 싸워 승패를 가르자고 도전했습니다. 당시 근동 국가간에 전쟁이 터지면 거의 모든 군사들이 죽기 때문에 병력과 물자를 아끼기 위해 챔피언들끼리만 대결시키는 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허용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19506월 25일, 38선 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백두 장사와 대한민국 한라 장사가 나와 한판 씨름으로 승부를 가렸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옛날 성경 인물들이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아 공부 많이 한 현대인들보다 훨씬 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골리앗은 계속해서 도전할 자 없으면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차분하게 골리앗의 정체를 살펴보면 사실 그는 한심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소년이 던진 돌멩이 하나에 거꾸러진 종이 호랑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전략은 허세를 부리며 우는사자같아 (벧전 5:8) 으르렁거려,이스라엘을 두려움에 빠뜨려 스스로 항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최면 전술,심리전이었습니다. 공포심, 패배주의, 절망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화상을 하나님의 백성의 가슴에 꽂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군과 사울왕의 반응

블레셋 거인은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 이스라엘군 앞에 거구를 드러내고 베틀채 같은 창자루로 허공을 휘두르며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사울왕과 이스라엘군의 사기는 어떠했겠습니까?

2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삼상17:24)

놀라고 두려워하고 도망가는 군사들. 참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들은 골리앗의 심리전에 이미 패배당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늘 스트레스를 느끼고 염려와 두려움에 얽매여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도피주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골리앗 같은 문제가 앞에 도사리고 있는데 자기가 가진 자원은 연약한 몸,초라한 활이나 투석기 정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믿음 있는 자는 “도전이냐, 도망이냐”의 기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는 도전할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안 될까’ 하고 요행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17:25).

골리앗과 대결할 만한 사람이 한 사람 있다면 그는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었습니다(14:47-48). 그가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상태일지라도,회개하고 믿음으로 구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승리를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문은 결코 닫히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위해 암몬과 싸울 때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만 한다면(11장), 사울은 능히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웅적 용기는 모두 왕년의 추억일 뿐, 믿음을 잃은 지금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기력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이 입을 연것은 겨우 두 차례뿐이었습니다. 완전히 의기 소침해 있었습니다 . 소년 다윗이 보기에도 사울의 모습은 '낙담한 상태였습니다(1^: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허락하신 목적도 이런 전앞장서서 나가 백성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9:16). 그러나 사울은 백성 중에서 누군가 자기 대신 나갈 자가 나타나기까지 마냥 기다렸습니다. 고작해야 궁여지책으로 골리앗을 이긴 자에게 딸과 현상금을 주고,면세 특전도 주겠다는 포상과 물량 작전을 떠올리는 정도였습니다. 사울은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믿음을 통해 끌어와 쓰는 지혜가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골리앗 같은 현실적 과제의 압력에 대처하는 길이 기껏해야 자기 꾀나 돈과 인간을 의지하는 합리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도전

믿음 있는 한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는지 다윗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출전한 형들을 면회하러 전쟁터까지 왔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엘라 골짜기까지 온 것은, 잃은 암나귀를 찾으러 나갔다가 사무엘을 만난 사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골리앗이 호언 장담하며 위협하는 모습을 보는 다윗의 눈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똑같은 문제를 보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눈과 불신앙의 눈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객관적 대상은 동일하나 같은 대상을 향하는 주관적 태도가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다윗은 하나님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그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 대한 의분이 솟구쳤습니다. 대륙을 떠오르는 먼자 같이 보시고,대양을 ‘통의 한 방울 물’같이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40:15) 3m가 3옹스트롬(angstrom, 1/1억cm)으로라도 보이겠습니까. 다윗은 '너 같은 것이’ 하며 무시하는 큰 형 엘리압의 말에 개의치 않았습니다(17:28-30). 자기 소신이 분명합니다. 사울왕에게 당당하게 나아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소년 다윗을 본 사울은 능치 못하리라고 말했으나(17:33), 다윗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나섭니다. 그는 양떼를 움켜쥐는 사자나 곰의 수염을 잡고 쳐죽이고 양떼를 구했던 경험을 증거로 단호하게 사울에게 말합니다.

37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7)

다윗에게 과거의 체험은 확신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의 경험을 하나님의 관점에 정확하게 해석할 줄 아는 신앙적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맹수와 골리앗이라는 대상이 다르고, 목장과 전장이라는 상황이 다르나, 그에게 구원을 주신 전능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동일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며,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이심이 분명할진대, 3m 아니라 300cm의 키를 가진 원수일지라도 감히 어쩌랴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준 군복과 칼을 벗어두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목양 주머니에 넣고,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와 물매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군에서 감히 도전자가 나왔다고 해서 약간 긴장하여 다윗을 향해 걸어나오던 골리앗은 홍안의 귀여운 소년을 보더니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자존심이 상한 듯 큰 소리를 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아왔느냐.....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17:43-44). 다윗은 굴하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골리앗을 향해 외쳤습니다.

45다윗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삼상17:45~46)

다윗의 찬란한 승리

골리앗은 으르렁거리며 단번에 다윗을 거꾸러뜨리려고 방패든 자를 앞세우고 가까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알맞은 거리에 오기까지 침착하게 거리를 재며 나아가던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질주하며 주머니에서 돌하나를 꺼내어 물매로 돌리다가 휘악 던졌습니다.그러자 물매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빠져나간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퍽’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정통으로 꽂혔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게임이 끝났습니다. 골리앗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골리앗의 작전 미스입니다. 그의 놋투구, 놋갑옷, 놋각반은 칼과 창으로 싸울 때 유용한 것입니다. 빈 자리라곤 얼굴뿐인데 그가 갖춘 모든 군장비가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다윗의 맷돌에는 속수 무책이었습니다.오히려 전경이 투석전에서 얼굴에 쓰는 마스크나,야구포수가쓰는 마스크를 빌려갔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철무기 하나 없이 나간 다윗이 쓰러진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베자,블레셋 군사들은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는 환호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통쾌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하마터면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블레셋의 노예가 될 뻔했던 이스라엘은 한사람을 통해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 둘째, 실력, 셋째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이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것’ (17:47)이므로, 하나님께서 구원과 승리를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의 실력이란 오랫동안 갈고 닦은 물매 기술과 곰이나 사자와 싸울 수 있는 무술을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는 말씀으로 신앙 만능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나가기만 하면 일 년 만에 영어도 마스터하고,운전대만 잡으면 운전을 할 수 있고, 건반에 손가락만 놓으면 피아노 소나타를 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우주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과 실력이 있어도 나가서 싸우는 용기, 행동력이 없을 때는 쓸모가 없습니다. 투쟁 없이 어찌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가 모독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모험적인 투쟁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승리를 주신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그리스도인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선한 싸움을 싸우는 투쟁의 인생을 살수밖에 없습니다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싶지, 결코 힘들게 전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보장된 최후 승리와 안식을 얻기까지 지상의 크리스천들은 원수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적 성격입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승리하려면 먼저 원수를 알고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손자 병법이 적용됩니다. 일찍이 청교도들은 육신, 세상, 그리고 마귀 이 세 가지 신자의 원수와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음, 곧 사망 권세까지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flesh)’ 을 몸 또는 육체(body) 와 구분합니다.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과도하지만 않다면 신앙에 무해합니다. 그런데 육신이란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타락한본성, 예를들어 육체적 정신적 죄악된 습관이나성힝을 가리킵니다(롬 7:23, 갈 5:16~21, 벧전 2:11 참조). 우리는 과거에 죄사함을 받아 거듭났으나, 현재 내 속에 있는 죄의 권세에 얽매여 있습니다. 죄를 좋아하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못된 습관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신앙 생활의 최대 원수는 나 자신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며 울부짖게 됩니다.

죄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내 속에 있는 죄성, 죄의 사슬에서 결코 풀려날 수 없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패배했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점차 끈끈한 육신의 인력권에서 벗어나성령 안에 있는 은혜의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여 내면의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란 단어는 지구(시 24:1), 인류(요 3:16),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시대 정신, 또는 하나님 없는 가치 체계나 생활 양식을 가리킵니다(요일 2:15~16).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세속에 물들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죄악된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구석구석을 장악하여 신자들까지 부패시키는 죄의 세력, 그 세계악과 시대악을 과연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계란으로 바위 깨기하듯 미리 포기하기 쉽습니다. 닫힌 세계관과 인본주의 사상이 장악한 캠퍼스에서, 물신 사상의 노예 시장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골리앗 앞의 사울과 이스라엘 같은심정이 듭니다.

골리앗 같은 시대악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믿음과 실력을 갖추고 다윗처럼 도전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세상과의 싸움은 집단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연약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의 권능을 덧입었을 때, 1세기의 시대악을 정복하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뒤엎는 자들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싸우는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히 11:38) 챔피언들입니다.

세번째 원수는 어두움의 권세, 곧 사단입니다.

12우리는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엡6:12)

많은 신자들이 신앙 생활의 패배자로서 멍든 채 사는 이유는 사단의 실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사단과 악령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때 신앙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믿음의 비밀'(딤전3:9)이 생길 것입니다.

사단을 대적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기도와 말씀입니다.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을 가지고 죄지을 틈없이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증거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나 교회는 사단이 감히 넘겨다보지 못합니다. 교회는 사교장이나 사업장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며, 행사나 회의하는 곳이 아니라 말씀의 서당인 것입니다.

마지막 원수는 죽음입니다(고전 15:26).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인류는 모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 (히 2:15)입니다.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죽음 앞에 인간이 얼마나 철저히 무력한가를 처절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건강 식품이, 의학이, 그리고 어떤 철학이나 종교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를 느끼게 됩니다. 런데 이러한신앙 생활의 네 가지 원수가 됨 스피리트’ 정신으로 교묘하게 합동 공격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한 삶을 그저 연명하게만 만듭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 권세를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듯’ (시 2:9) 파하신 그리스도 외에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육신, 세상, 사단, 그리고 사망 권세 -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 자'(롬8:37) 들입니다. 이 점이 신약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다윗과 다른 점입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진리가,바른 교리가 우리의 실존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은사파라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오직 승리만 있고 만사 형통한다는 약간 맹신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승리주의(triumphalism)라고 하는 그들의 신앙 양태를 보면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하고 박수치면서 마치 자기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관에서의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승리는 보장되었으나, ‘아직’ 승리는 완성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말세' 라고 하는데,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싸우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 (딤후 2:3-4)로 징집된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는 휴가나 제대를 기대할 수 없는 군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위에서 악이 선을 이기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짓밟힘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도덕적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점에 관해 크리스천의 관점과무신론자의 관점이 다릅니다.

무신론자들은 악의 일시적 승리를 보며 하나님이 없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폅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첫째,하나님이 완전 선이라면,악을 멸하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악을 멸하실 수 있다.

셋째, 그러나 악은 멸해지지 않았다.

넷째,그러므로 완전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논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개념에 시간 제한을 두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르게 생각해야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완전 선이라면,악을 멸하실 것이다.

둘째,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악을 멸하실 수 있다.

셋째,악은 아직 멸하지 않았다.

넷째,그러므로 악은 언젠가 패배할 것이다.

여기서 '언젠가 패배당할 것’ 이라는 미래 시제가 중요합니다. 최후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골리앗 같은 악의 세력 그리스도의 부활로 등뼈가 부러졌으나 아직은 사지를 움직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단의 권세가 완전 섬멸되고,하나님의 완전 통치가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우리 크리스천들의 종말론적 희망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주여,어서 오시옵소서”라고기도하며 최후승리의 날을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죄와 싸우되 피 홀리기까지 대항해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히 12:4). 자기 자신과의 싸움(고전 9:26-27),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세계관과의 사상적 싸움(고후 10:4-5), 그리고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 대한 영적 투쟁입니다(엡 6:10-20). 감사한 것은 우리 믿는 자에게 백전 백승의 전략과 무기와 군사를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11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으로 그 고소자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계12:11)

십자가보혈의 복음, 증거의 말씀,생명을 아끼지 않은 헌신이 있고, 성령의 권능을 덧입을 때 골리앗 같은 세계악을 다윗 같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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