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린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자기 자식이나 남편을 보낸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모든 성에서 나와 승전을 축하했습니다. 환성을 올리며 꽹과리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사울왕을 맞았고, 여인들은 덩실거리며 노래를 주고 받는 오랜만에 마음껏 즐기는 큰 민족적 축제였습니다.
온 백성의 마음이 기쁨에 차 있었으나 한 사람 사울왕의 마음은 심히 불쾌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울은 자기 마음을 잘못 다스려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번 7장에서는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려면 정의로운 체제와 제도가 중요한 만큼 지도자의 인격 요소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울의 걷잡을 수 없는 시기와 질투를 배경으로 하여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서로 마음이 맞았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었습니다. 남달리 치열한 경쟁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부대끼며 사느라고 우정이 메마른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은 도전과 동시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시기심
개선 행진을 하는 사울왕과 다윗, 그리고 이스라엘군을 맞는 여인들의 한쪽에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라고 노래를 부르면 다른 쪽에서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번갈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팝송' 을 지어 부른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왕은 그만 심사가뒤틀리고 말았습니다.
8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18:8~9) |
여인들의 노래가 그렇게 사울을 불쾌하게 하고 심히 노하게 할 성격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시에서 ‘천’ 이나 만’ 은 아주 많은 수를 비교의 개념 없이 단순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시 91:7).
여인들의 이행시는 "사울과 다윗 두 영웅이 수많은 자들을 죽였다네”라는 의미의 대구일 뿐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말을 받아들이는 사울의 마음 자세가 문제였습니다. 사울은 승전과 민족 구원의 감격도 사라지고, 다윗의 서열이 지키와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괘씸하고 분했던 것입니다.
이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경쟁자, 곧 라이벌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경쟁과 비교의 눈으로 보게 되자 사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순간 불쾌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자 두고보자 하는 분노로 발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곧 화를 푸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게 됩니다"(엡 4:26~27_현대인의 성경) 마음에 분노를 품고 살면 사단의 밥이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개 분노가 생기는심리적 원인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디 좌절감, 모욕감, 그리고 소외감인데 사울의 경우는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홀로 존경과 영광을 차지하고 싶었지만, 다윗의 등장으로 자신이 백성들에게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심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자기 밑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둘 수 있는 통이 큰 사람, 넓은 마음의 소유자라야 합니다. 저 친구가 내 경쟁 상대가 아닐까, 더 크기 전에 눌러버려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때는 큰사람이 될 수도, 큰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지위나 서열을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민고 사는 사회에서는 비광적 평등한 인간 관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지 못한 사람들의 사회는 늘 "누가 크냐"하며 긴장하는 비교 의식과 경쟁 의식을 극복하기 힘듭니다.(막 9:34)
서구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하나님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수평적 의식 구조를 존중하는 데 비해 유교 문화권 아래 있던 동양인들은 모든 인간 관계 를 수직적이고 서열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울의 경우도 이런 서열 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설사 여인들이 그런 노래를 부를 때 다윗을 더 높이는 뜻으로 불렀다고 칩시다. 만약 사울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정말 그래, 다윗이 아니었더면 우린 모두 블레셋의 밥이 됐을 거야. 다윗이야 말로 국방 장관감이지. 이런 훌륭한 청년이 내 신하 중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했다면 세상은 참으로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울은 경쟁자를 없애야만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신 성적에서 늘 2등밖에 못하는 학생이 1등 하는 친구가 아프거나 자동차 사고라도 나길 바라는 심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전처럼 수금을 타며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다윗을 향해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18:10<1). 전에는 수금 소리를 듣고 상쾌해졌으나 이제는 다윗을 향해 발작에 가까운 충동으로 살해하려 합니다.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사울은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 포피를 베어가지고 오면 딸을 주겠다고 하여 다윗을 전사시키려는 음모도 세워보았습니다(삼상18:17-29).
사울은 더이상 나라를 어떻게 잘 다스릴까 하는 건설적인 일에 시간과 정력을 쓸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기를'(18:17), '스스로 이르되'(18:21), '이는 사울의 생각에'(18:25)라는 표현들을 보면 그가 정상적인 사고의 능력도 상실하고 음모와 술책으로 정적(政敵) 아닌 정적을 제거하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생각을 다스리는 훈련된 사람은,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 때, 기도하고 얼른 생각의 테이프를 바꿔놓을 줄 알 것입니다.
크게 지혜롭게 행하는 다윗
이상한 점은 사울이 다윗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술책을 행하는데도,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는 항상 다윗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왕궁에서 내 천부장으로 삼으면 인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윗은 백성과 같이 지내게 되어 더욱 백성의 사랑을 받게 되고 명성을얻게 됩니다.
14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삼상18:14~16) |
미갈이 다윗에 대해 연애 감정을 가진 것을 미끼로사울은 다윗에게 전쟁에서 이기면 사위로 삼겠다고 하여 블레셋 진영에서 전사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어쩔 수없이 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에는 잠자는 다윗을 암살하라고 군졸들을 보내었으나 오히려 미갈이 미리 알고 창에서 달아 내려 도망가게 해줍니다(19:11-17). 어쩌면 이토록 사울의 인생과 다윗의 인생이 하나는 하향선을 그리면서 하는 일마다 안 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상향선을 그리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일까요.
사무엘서의 저자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18:12)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애매하게 사울왕의 질투를 받으며 미움의 대상이 되어, 사울이 사는 날 동안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 애매하게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의 지혜의 사 라고 불리우는 시편 37편을 읽어보십시오.
1악인들 때문에 안달하지 말고 못된 짓 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아라. 2그들은 풀과 같이 곧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3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그러면 너희가 땅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번영을 누리며 안전하게 살 것이다. 4여호와 안에서 너희 기쁨을 찾아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를 신뢰하면 그가 이루실 것이다. 6저가 네 의를 정오의 태양같이 빛나게 하시리라. 7여호와께서 행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악인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안달하거나 부러워하지 말아라. (시편 37:1~7, 현대인의 성경) |
다윗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불평하거나 문제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며 선을 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내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때,평온을 누리며 매일매일 의미 있게 창조적으로 살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친구로 주셔서 그 우정을 통해 생명을 보존하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마음이 연락되어 시작한 우정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친구로 삼고 그 귀한 생명을 주심으로 친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가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고독한 세상, 마음 맞는 친구를 못 찾아 별로 재미없는 야박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 나도록 고마운 우정 입니다.
동양인들은우정을논할 때면 관포지교’를말하고 서양인들은 ‘다윗과 요나단'을 이야기합니다. 유안진의〈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수필을 현대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런데 좋은 벗을 사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 공자는 지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향기 좋은 화초를 방안에 둔 것같이 오래 되면 그 향기는 맡지 못하더라도 그와 더불어 감화될 것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저 생선 가게에 든 것 같아서 그 냄새를 오래도록 느끼지는 못해도 역시 그와 더불어 감염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와 함께 사귈 사람을 신중하게 고른다.”
요나단은 어떻게 다윗을 친구 삼았을까요?
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18:1~4) |
요나단과 다윗은 마음이 하나 되어 우정이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되었다"는 표현은 "사슬로 고리가 맺어져 끊어질 수 없이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의 속 사람이 다윗의 속 사람과 서로 나눌 수 없게 사슬로 묶여졌으므로 혼과 뜻이 맞아 맺어진 우정이었습니다. 동양 격언에도 “얼굴을 아는 이는 천하에 가득하되 마음 아는 이는 몇 사람이나 될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마음을 활짝 터놓고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대장부다운 젊은이였습니다. 14장에서 경호병 하나만 데리고 용감하게 블레셋 진영에 들어가 기습 작전을 승리로 이끈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용기 있던 요나단도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통쾌하게 골리앗을 쳐죽이고 돌아올 때 그들은 마음이 하나 되었습니다. 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라고 선언한 신앙이나 다윗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17:47)하며 골리앗 앞에 나간 신앙은 똑같이 보배로운 신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 신앙으로 하나가 되었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민족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첫인상이 좋아서나 취미가 맞아서, 아니면 술 친구로 사귄 우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적 친구요, 하나님나라의 동역자로서 동지애로 맺어진 친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를 ‘자기생명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18:1,3, 20:17).
역경 중에 연단된 우정
만약 다윗에 대해 시기심을 갖고 경쟁자로 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사울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다윗의 편에서 그를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윗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다가 하마터면 단창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20:33).
그러나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역경 속에서 더욱 연단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 때문에 기뻐하고(19:1) 아버지와 다윗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변호하며(19:4), 당황하는 다윗을 격려했습니다.
3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4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삼상20:3~4) |
끝내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슬퍼했습니다(20:34). 이렇게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우정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 때문에 그 우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18:3)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20:8)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20:17)라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변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하여도 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우정은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을 지키는 한,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함께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요나단은 혈육의 정이나 사사로운 이익보다 진리 편에 서서 다윗을 사울 앞에 변호했습니다(19:4~5). 요나단은다윗과 언약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삼상20:16) |
여기서 다윗의 대적이란 누굽니까? 아버지 사울까지도 포함되는 말이 아닙니까? 이러한 요나단에게 다윗도 말합니다.
8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삼상20:8) |
그들은 부정에 야합해서라도 이익을 나눠 먹자는 모리배가 아니었습니다. 지연,학연,혈연으로 얽혀 공명 정대함을 버리는 졸장부들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날의 우정이 맹목적인 *정(情)’ 에만 치우쳐 진리에서 떠난 친구를 무조건 옹호해주다가는 잘못되기 쉽습니다.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부조리가 정으로 얽혀 정의를 떠난 인간 관계에 있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인간 관계가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는 좋으나 어려움 속에서는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로 갈라서거나 소원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 교만한 마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서로 마음 맞는 우정을 유지하는 길은 각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 나가도록 힘쓰며,각자 예수님과의 친구사랑을 끊임없이 유지하여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나갈 때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친구의 뜻을 존중하며 자신 있게 친구를 위해 손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셋째,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비밀을 나누며 신의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며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폴 투르니에(Paul Ibumier)의「비밀(Secrets)」은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서로 얼마나 비밀을 나누느냐에 따라 우정의 단계가 발전합니다. 어떤 점에서 인간의 친밀함이란 조금씩 비밀을더 깊이 더 많이 나누는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투명하고 숨김없이 다 내놓고 산다는 말을 하는데, 말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어항 속의 붕어도 자기의 내장까지 내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비밀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까지는 타락한 인간의 한계를 임상학적으로 인정하는 현실적 접근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친밀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사귐,부부 사이나 친구 사이의 사귐에서 모두 마찬가지로 비밀을 나누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항상 상대방의 비밀은 듣지만 자기 비밀을 내놓지 않는 사람과는 우정을 지속하기 힘듭니다. 한편 내가 친구와 나눈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공개해버릴 때도 그 우정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신의를 깨어버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어떤 자들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표현을 가리켜 그들의 관계가 동성애의 시초였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동성 결혼식을 교회에서 집례하는 목사나 신부까지 생겼으어 부끄러운일입니다. 이렇게 참된 동성간의 우정이 사라지는 시대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같은 뜻을 품은 신앙적 동지들이 '복음의 교제’ 를 갖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빌1:5) 신앙적인 모임에서 만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시대를 위해 함께 일하려는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어’ 시작된 우정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에게 있어서 신앙적 친구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보낸 ‘생명의 수호자 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우정을 나누게 된 신앙적 친구들은 서로의 영적 생명이 성장하고 풍성해지도록 기도하고 격려하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엡 4:15) 우정을 익혀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적 친구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에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얄팍한 인간 관계에서 깊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정을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헤어진 우정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천리입니다. 사울의 적대적인 태도에 변함이 없자, 다윗은 사울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왕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망명 생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 자기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은 함께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가 정의나 우정보다는 역시 혈연을 중시한 것은 아니었는가, 혹 왕위 계승의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실 정의의 관점에서만 단세포적으로 생각하면 다윗과 더불어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과 협의해서 사울을 폐위시키든지, 아니면 죽이는 편이 옳지 않았을까요? 여기에 사랑의 복합성과 갈등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후에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합니다. 이들을 애도하는 다윗의 애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1:23) |
골리앗과 싸우던 다윗이 결코 비겁해서 도망간 것도 아니었으며 ,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라고 말하던 요나단이 왕궁에 남아 있는 것이 결코 불의와 타협했기 때문이 아님도 분명합니다. 아버지에게도 친구에게도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요나단은 누구를 택해야 할지 고심했을 것입니다. 다윗이나 요나단의 선택은 각자의 신앙 양에 따른 결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결정을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 결정이다."라고 쉽사리 판결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사무엘서 저자의 입장은 다윗이나 요나단의 이별을 어떤 비판 없이 사실로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별의 날은 다가오고야 말았습니다. 만날 때보다도 헤어질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더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다윗은 요나단 앞에 나가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며 친구이자 황태자인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창13:3, 42:6) 그리고 입을 맞추어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런 후 늘 그러듯 요나단이 먼저 다윗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42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삼상20:42) |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 라는 영국 속담 그대로 사람은 헤어지고 나면 마음도 멀어지며 세월이 흘러갈수록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은 공간적으로 헤어지고 시간적으로 이별을 고하게 되었지만,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구름다리가 되어 그들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함없이 이어지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눈물겨운 우정은 시공을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에 요나단이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고할 때 다윗은 망명중에 이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금식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정적인 사울이 죽었으니 이제 머지 않아 왕위를 이어 받게 되리라는 기대보다는 생명을 나누던 친구 요나단의 죽음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는 애가를 지어 이렇게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젊은 날 이토록 친구 때문에 울 수 있었던 다윗은 참으로 행복한 자였습니다.
26내 형제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위해 슬퍼하노라. 그대는 나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고! 나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깊지 않았던가!(삼하1:26,현대인의 성경) |
다윗은 많은 여인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달콤함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의 우정같이 진실하고 생명을 다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아지” 하며 언젠가 우리는 모두 헤어져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 자매 그리고 친구 사이에도 모두 헤어질 날이 오고야 맙니다.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다시 만날 기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까. 그래서 우리는다시 만날 소망 때문에,이땅 위에서 서로 이해와 용서를 배우며 인내하는 사람이 사랑의 예술성을 익히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참된 우정이 드물어졌습니다. 고상한 뜻과 이상을 향해 하나 되어 서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동성끼리의 진실한 우정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우정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눅 1장). 만나서는 무척 친한 모습을 하지만 내심으로는 경쟁하며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는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어’ 하나님과 겨레를 함께 섬기는 우정이 부활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친구 삼아야 할 것이며(약2:23),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요 15:12~15). 그리고 누가 내게 친구가 되려고 다가오지 않는가 막연히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같이 친구를 삼기 위해 내 편에서 먼저 나서야 합니다.
우리같이 냄새나는 죄인들을 친구 삼으시려고 하늘나라의 황태자이신 우리 주님이 먼저 낮아지고 하늘의 비밀을 나누어주며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 위에서 숨을 쉬는 동안, 아니 저 하늘나라에서 나의 변함없는 친구, 우리 주님을 얼싸안고 포옹할 그날까지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다윗과 요나단 같은 우정을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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