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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하 1장~5장 3절 _통일 이스라엘

by 비앤피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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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삼상5:3)

“우리의 소원은 통알’ 一 이것은 우리 한민족뿐 아니라, BC 10CXM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사울이 죽은 후 분단된 이스라엘이 어떻게 다윗의 지도력 아래서 민족 통일을 이루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7년 반에 걸친 이스라엘의 통일 운동의 전개 과정은 분단 시대의 막바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한 역사적 교훈을 줍니다.

사울이 죽은 후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사울 독재 40년의 묵은 시대가 가고 드디어 다윗 통치의 새 시대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새 시대가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듯했지만 사실 블레셋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뜻했습니다. 더구나 다윗이 블레셋 지방에 1년 4월이나 망명해 있던, 블레셋의 봉신(封臣)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사실상 주권을 빼앗긴 블레셋의 속국이 었습니다.

블레셋은 사울과 그의 세 왕자까지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인 후 이스라엘의 도성을 차례로 점령해갔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에는 중앙 정부가 없고 더이상 군사적 위협이 안 되었으므로 블레셋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자치권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분할해서 통치한다 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방식을 원시적으로 적용한 셈입니다.

사울이 죽자 이스라엘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외우내환(外憂內患)이 겹치게 되었는데,이런 혼란을틈타기회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다윗을 찾아와서 자기가 사울을 죽인 공로자라고 거짓을 말한 아말렉 사람이 그 대표자였습니다. 사울이 갔으니 이제는 대세가 어디로 기울 것인지 저울질하다가 다윗에게로 달라붙어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해방 후 친일파들의 작태와 비슷합니다. 

다윗이 속이 좁은 사람이었더라면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 환호성을 질렀을지 모릅니다. 사울의 왕관을 가지고 온 사람을 포상하고 그 왕관을 써보고 싶었을 텐데, 다윗은 결코 그런 소인배가 아니었습니다.

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하1:11~12)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 즉 왕의 신분이 신성함을 굳게 믿는 다윗은 몹시 슬퍼했습니다. 더구나 생명같이 사랑하던 친구 요나단의 때아닌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저녁 때까지 슬퍼하던 다윗은 눈물을 거두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청년을 즉시 처단하고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어 온 유다족속에게 가르치게 했습니다.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1:19)

다윗의 애가는 활 노래’ 로 백성들에게 불리워졌는데, 구약에 나온 히브리 시 가운데 최고 걸작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 시에는 한 마디도 사울에 대한 비난이나 원한이 없고 오히려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 이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용사 들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활을 매만지고 활 끝을 갈면서 이 노래를 불렀고,다시는 사울이 당했던 패배의 쓰라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민족분열

사울이 갔으니 다윗의 왕위 계승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길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유다지파와 나머지 지파가 나뉘어져 민족 분열과 동족 상잔의 내전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2:1)

시글락에서의 경험은 다윗을 겸손한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삼상 30장).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 는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의 연단받는 과정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려는 통치 구도를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통치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배 권력을 획득하느냐에 따라 후에 피지배자의 승인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컨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한 자들이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승인을 받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 왕위에 오르겠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세운 후, 고달픈 황야의 무법자 생활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 응답을 받고 600명 동지들과 함께 헤브론에 도착하자,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습니다(2:4).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된다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비록 가장 인구가 많은 지파라고는 하지만 남쪽 한 지파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은 민족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무분별한 정치욕에서 나온 것으로 추궁받을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분단 과정 속에 나타나는 외세의 분할 점령에 편승한 일부 세력의 자세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다윗은 자기 혈족인 유다지파를 통치 기반으로 삼아 이스라엘 전체를 통일시키기 위한 설계를 가지고 망명 생활중에도 꾸준히 준비해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성읍 가운데 하나인 그일라 사람들이 추수하고 곡식을 저장해놓은 타작 마당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둘람굴 용사들을 이끌고가서 구원해준 적이 있습니다(삼상 23:1~5). 또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아말렉 군사들과 싸워 가축들을 비롯하여 많은 탈취물을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모든 유다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예물로 보내면서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삼상 30:26)고 호의를 표하고 우정을 지속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이미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 받은 사실을 잊지 않고 왕위 계승을 위해 빈틈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윗이 유다왕이 된 지 5년 반 후, 북쪽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마하나임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허세였고,실세는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길보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울의 사촌 아브넬이었습니다. 아브넬은 오랫동안 다윗의 라이벌이요 사울 정권의 총사령관으로서 유다 지파 이외의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서로 자기들이 민족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열방과 같은 왕국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스보셋이 사울 왕조를 계승했으므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더 유리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한 번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자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음을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거듭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보셋이 왕 된 것도 아브넬이 ‘데리고 … 가서’(2:8) 왕 삼은 것이지, 하나님에게도 백성에게도 승인받은 적이 없음은 명백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 체제를 갖는 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적 지도자 다윗의 유다 왕국이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동족 상잔의 내전

정통성을 서로 주장하는 두 지배 세력간의 갈등은 필연적 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군사령관 아브넬은 남 유다의 군사령관인 다윗의 조카 요압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는 30여 만의 대군사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압의 소수 정예 부대를 우습게 보고 군인 대표들로 하여금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고 싸움을 걸었습니다(2:14). 요압이 이에 응하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젊은 군인들을 뽑아 기브온 연못가에서 전투를 통해 군사력을 겨루어 보기로 했습니다.

15그래서 양편에서 각각 12명씩 뽑아 세웠는데
16그들은 서로 머리를 붙잡고 칼로 상대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모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곳을 칼의 밭이라 부르게 되었다.(삼하2:15~16, 현대인의 성경)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참극입니까? 자가 실현과 조국 건설을 위해 훌륭히 쓰일 수 있는 그 귀한 젊은 생명들이, 지휘관들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단지 일개 병력으로 소모된 것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5)는 말씀대로 이 사건은 민족의 앞날에 멸망이 예고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2명의 대표 결투로 승부가 나지 않자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보복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아브넬의 군사가 아둘람굴 용사 출신이 주축이 된 요압 군사들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도망가는 아브넬을 끝까지 추격하던 아사헬은 아브넬의 창에 찔려 즉사합니다. 요압과 아비새는 아우의 피에 복수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 아브넬을 뒤쫓습니다.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2:26)라고 동족임을 일깨워주는 아브넬의 평화 제안을 요압도 받아들여 일시적인 평화 공존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남북간에 적대 관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때 유다 군인들 사이에선 “때려잡자 이스보셋”,이스라엘군은 “무찌르자 다윗”이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살벌한 사회 분위기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 격전에서 다윗 편은 아사헬과 19명,아브넬 편은 360명의 생명이 무참하게 죽었습니다(2:3031). 동족간의 전쟁은 비생산적인 소모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3년 1개월간의 한국 전쟁에서 양쪽 모두 각각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낸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전후 40년 가까이 우리는 가난과 증오와 한을 품고 살아오면서,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 (막 3:24)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뼈아프게 확인해왔습니다. 어쩌면 우리 삼천리 반도는 동족끼리 싸우다 피홀린 또하나의 칼의 밭 이요,‘피의 강산 일 것입니다.

일어나는 통일 운동

분단이 점점 고착화되고 있을 때 전혀 기대히지 않았던 북 이스라엘의 군사령관 아브넬을 통해 남북의 통일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다른 어떤 말로도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넬이야말로 권력욕의 화신 같은 정치 군인이요,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일 협상의 전개는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동침하자 이스보셋의 추궁을 받았습니다. 고대에는 첩이 주인의 합법적 재산이었으므로 왕의 첩과 내통하는 것은 왕위를 장악하는 시위 행위로 여겼습니다(삼하 16:2021 참조). 추궁받은 아브넬은 격분하여 무능한 이스보셋 - 자신이 세워놓았으나 백성들이 따르지 않던 허수아비 왕을 퇴위시키고, 온 이스라엘 족속을 다윗에게 데려가서 민족을 통일시키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넬은 처음 북쪽 지파들을 규합해서 왕국을 세울 때나 세도 정치로 실권을 휘두르던 지난 2년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세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2:9). 그는 내친김에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통일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아브넬이 이스보셋과의 내분 때문에 다윗에게 통일 협상을 제의한 것이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브넬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남북간의 힘의 균형은 깨지고 갈수록 국력의 차이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1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유다 왕국은 다윗의 지도력 아래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경제력, 군사력이 날로 증강해 이제는 경쟁이 되지 않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브넬은 정권을 잡는다 해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을 뻔히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둘째,이스라엘 장로들을 비롯해 민심이 점점 다윗에게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삼하3:17~18)

북 이스라엘은 이스보셋이 허수아비 왕으로 있으면서 장로들이 집단 지도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의 말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다윗을 왕으로 삼자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을 비롯한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위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대외자주화를 유지하고 자존할 수 있는 길은 민족 통일뿐이며, 통일은 다윗을 정점으로 하여 이루는 것이 국제 역학적 현실을 고려할 때나 자손 만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남북 합작만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3:19)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홉수 통일 방안 같기도 하지만, 남북이 신정 군주 체제의 차이가 없었으므로 통치자 중심의 통일 방향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아브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통일 운동이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다는 신앙 양심의 호소를 들었다고 보는, 다분히 개인적 요소도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에게 똑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민족애가 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2:26).

다윗과 아브넬의 회담

아브넬의 통일 협정 체결 제의를 받은 다윗은 조건부로 승낙했습니다.

12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3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삼하3:12~13)

과연 이브넬이 부하 20명을 데리고 헤브론의 다윗을 찾아오자 다윗은 큰 잔치를 베풀어 최고의 국빈으로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브넬은 이미 제안한 대로 온 이스라엘을 다윗의 치하에 돌아오도록 하며,“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디"”(3:21)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평화 통일을 위한 협정을 체결한 셈입니다. 이 자리에서 통일 후 아브넬에게 군사령관의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는 밀약이 오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제의를 정중하게 받아들이고 그들 일행을 안전하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왜 매사에 적극적인 다윗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통일 정책을 세워 밀고나가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북에서 제의가 오기까지 기다리며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것과, 둘째, 이토록 민족사적인 면에서 중차대한 국사를 논하는 때에 센티멘털하게 아내 미갈을 돌려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 될 텐데….

다윗이 미갈을 보내라는 요구는 100명의 블레셋군을 죽여 얻은 첫 부인이라는 애틋한 정도 있었을 것이며 이산 가족이 결합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 사울의 왕권을 존중하는 북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울의 왕위를 계승한 자로 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겠다는 정치적인 몸짓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브넬의 협상 제안에 즉각 조건을 거는 지혜를 보면 다윗이 결코 통일에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를 미리 내다보고 치밀하게 복안을 세워 준비해온 출중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민족 통일의 대과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어가고 평화 통일에의 길은 훤히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시기에 민족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요압과 그의 추종 세력이었습니다.

평화 통일의 저해 세력

통일 회담을 마치고 부푼 꿈을 안고 돌아가던 아브넬은 후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요압에게 암살당합니다.

27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삼하3:27)

요압의 아브넬 암살은 무서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본래 헤브론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도피성’ 으로(수 21:13), 그곳은 살인자가 군중 앞에서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복수하려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곳입니다(민 35:12, 22-25).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사실상 정당 방위에 해당한 것이기도 했습니다(2:19~23).

요압의 생각에 아브넬의 살해는 국가 안전 보장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왕이 정탐을 온 간교한 아브넬을 순진하게 믿다가는 장차 안보에 큰 위험이 올 것이라고 항의하면서(3:25), 요압은 방약무인한 월권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형 언도나 집행은 오로지 왕의 권한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인 정치적 이유가 무엇이든, 저자는 간단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라고 주석합니다. 요압의 증오에 찬 개인적 복수심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요압과 아브넬 사이의 경쟁 관계입니다. 장차 누가 통일 왕국에서 제2인자가 되겠습니까. 해방 후 김구 선생을 롯해 적지 않은 민족 지도자들이 암살당했던 배경을 상기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압의 입장에서는 민족이 통일되어 제3인로 밀려가 아브넬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지낼 바에는 차라리 분단된 채 제2인자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 통일을 저해하는 것은, 오랜 적대 관계 때문에 응어리져 있는 상호 불신과, 증오라는 심정적 요소와, 분단 체제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통일로 인해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하여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집단적 압력 요소였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지켜온 최우선의 원칙이 폭력을 배제한 평화적인 민족 통일이었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심복이 이 원칙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요압은 소의를 위해 대의를 저버림으로써 다윗과 민족의 역사,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 힘든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어떤 도덕적 과오보다감정과 욕심에 눈이 멀어 민족 공동체의 앞날에 치명적 고통을 주는,역사 의식이나 사회 의식의 부재로 저지르는 죄가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못박은 바리새인들의 범죄, 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군인들이 민족 앞에 저지른 범죄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압은 군인일 뿐 하나님의 사람은 못 되었습니다. 무르익어가던 통일 운동에 재를 뿌리고 찬물을 끼얹은 요압의 행위로 온 이스라엘은 경악했을 것입니다. 이때 난관에 봉착한 다윗은 어떻게 민족적 위기를 타개해갑니까?

아브넬을 애도하는 다윗

아브넬이 암살당한 사건이 북 이스라엘에 미친 파고(波高)는 상상 외로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브넬의 암살은 다윗의 사주에 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통일의 기회가 이 사건으로 무산될지 모른다는 것을 다윗은 충분히 감지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동안 왕권을 얻기까지 생명을 나누었던 자기의 충신이요, 혈통으로는 조카인 요압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로서 무섭게 저주했습니다.

28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그 죄가 요압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삼하3:28~29)

그리고나서 요압까지 포함해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직접 상여를 따라 묘지까지 가서 장사하고, 그 무덤가에서 소리 높여 울었고,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정치적 쇼가 아니라 진심으로 슬퍼하는 다윗의 진실하고 공적인 애도 행위는 아브넬 암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을 거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백성들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확인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36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3:36~37)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나 사울의 심복 아브넬이 죽었을 때, 애가를 지어 큰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원수를 향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 줄 아는 아량 있고 관용의 덕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오늘의 직분이 사울같이 백성들에게 권세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떼와 함께 동고 동락하는 목자의 삶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군사력을 빌려서 통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7년 반이란 긴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지배자가 되었을 때 피지배자의 형식적 굴종을 얻어낼 수는 있으나, 결코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사울의 폭정에 쫓기며 피해다니는 동안에 뻣속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민족 통일을 위해서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 동포들이 먼저 불신과 증오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씻어내어 민족애를 회복하는 ‘심정적 통일 운동 일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서부터 통일의 장애물을 헐어내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은 장벽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엡 2:14) 남북 동포들이 형제 자매로서 민족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왕국의 기초를 정의 위에

아브넬까지 암살당하고 북이스라엘에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오자 무질서한 사회에 다시 기회주의자들이 날뛰었습니다.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중 레갑과 바아나 형제가 침상에서 낮잠 자는 왕의 목을 베어 다윗에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아마 큰 포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륜에 어긋난 반역 행위를 행하고 민족의 화합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거스리는 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했습니다.

11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삼하4:11)

다윗은 통치자로서 기본 의무인 권선 징악의 책임을다하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이 필요한 이유, 곧 국가의 주된 존재 목적은 질서 유지와 정의 실현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4절에서 정치 권력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4그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악한 일을 하면 두려워하십시오. 그가 쓸데없이 칼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롬13:4,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공정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청년이나, 이스보셋왕을 암살한 레갑과 바아나 같은 비도덕적인 정치 군인들이 득세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되어 국가의 도덕 질서나 법 체제가 무너지고 부정 부패가 난무하게 됩니다. 다윗은 단호하게 죄를 처벌함으로써 처음부터 불의한 폭력을 국가 공동체에서 근절시키고 있습니다.

범죄 행위에 대해 공정한 처벌이 있어야 사람들은 죄가 초래하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므로 범죄 예방 효과도 있고,죄의 질에 따라 알맞는 형벌을 받게 함으로써 죄인들을 교도(敎導)시켜 범죄 발생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에 따라 반드시 죄를 벌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공의로운 사회였습니다.

특히 지도자가 죄를 묵인하고 범죄 행위를 방조하여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면 민심은 그 지도력을 떠나게 됩니다.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득세하여 독립 운동가 가족을 학대했듯이, 남 유다에서 레갑과 바아나가 득세하게 된다면 북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다윗의 리더십을 신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극형으로 처벌받고 그들의 시체가 헤브론에 걸린 것이 확인되자 백성들은 왕을 경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정의와 공의로 유다를 통치하는 다윗의 왕도는 북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을 왕으로 모시게 하는 인력이 되었습니다.

먼저 서독이 정치의 민주화, 경제 정의 실현, 사회 복지 제도, 인권 보장 등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정권이 신뢰를 받게 된 후에, 동독 시민들이 기회가 주어지자 노도처럼 자유와 행복을 찾아 서독으로 탈출해오던 사건과 흐름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 다윗

본문에서 저자는 당시 다윗의 지파인 남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민족 통일 운동에 일치된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아브넬에게 요청했던 사실과, 후에 다윗에게 찾아와그의 통치권에 소속하길 청했던 사실을 미루어보면 모든 백성이 민족 통일은 당위적인 것으로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가 형태나 지도 체제로 보아 이스라엘의 통일 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지도 세력의 정치적 리더십과 협상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다윗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추측할 수 있는 여 러 증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즉위하여 맨 먼저 한 일이 사울왕의 지지파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친선 사절단을 파견해 사울의 시체를 장사한 것에 대해 사례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 을 알리면서 그들의 마음을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2:5~7).

둘째,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의 결혼을 통해 북쪽 국가들을 우방으로 삼아 친선 관계를 이룸으로써 통일에 대한 국제 분위기를 우호적

으로 유도하려고 애썼습니다(3:3).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근동의 국가들의 관례인 정략 결혼이었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쓰라렸습니다. 후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압살롬이 부왕을 반역하여 다윗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 상처를 주었습니다.

셋째, 이미 언급한 대로 사울의 딸 미갈을 다시 아내로 데리고옴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3:13-16).

넷째, 군사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노력도 통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3:1).

다섯째, 이스보셋왕 암살범들을 처형함으로써 북 이스라엘 왕조에 대한 예우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통일이 결코 폭력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통치자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에게 통일의 목표와 방향이 정의와 평화라는 점을 시위하면서 전쟁 없는 평화 통일의 분위기를 성숙시켜나갔습니다(4장).

마지막으로, 다윗은 개인적으로 동역자들과 함께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 어디로 가리이까"(2:1)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던 다윗이 민족 통일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쓴 시로 여겨지는 시편  27편을 통해 다윗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13나는 아직도 이것만은 확신한다. 내가 살아 있는 이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리라.
14여호와를 바라보아라!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를 신뢰하여라.
(시27:13~14,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일어난 통일 운동은 어느 한 요소, 예컨대 국력의 현격한 차이, 상대방의 내분, 민족주의, 종교적 일체감, 외세에 대한자구책 등 어느 한 가지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갈래의 시내가 강물을 이루면서 바다를 향해 흐르듯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가 동시에 작용해서 통일의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말하자면 ‘역사의 기운 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사의 기운 을 불신자들은 '시운(時違)’이라고 부르지만, 기독교 역사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라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로서 자신의 뜻에 따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진행 과정이나 그 방법은 시공에 제한된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입니다(사55:8-9, 롬 11:33-36 참조).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갑자기 온 것 같으나 사실은 오랜 준비의 결실이었습니다. 마치 독일 통일이 국제 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해 갑작스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한 브란트 수상의 동방 정책 이후 10여 년의 다각적인 정치적 노력과 동독 교회와 총회를 같이 여는 등 끝까지 민족 통일을 위해 힘쓴 서독 교회의 기도와 희생이 기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는 예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이스라엘 모든 지파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삼하5:1~3)

다윗의 대관식은 다시 하나님 - 왕 - 백성 사이의 3중 언약을 세우는 예식이었습니다(왕하 11:17 참조).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신정의 기초 위에 ‘입헌 군주 국가 의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근대 국가의 성립 훨씬 이전에 국민의 합의와 승인 절차를 통치권자가 세움 받는 정치 선진국을 수립한 것입니다.

한민족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이번 11장을 마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본문이 당시 이스라엘의 민족 통일 운동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라기보다는, 다윗이 어떻게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역사학이나 사회 과학에서 사용하는 객관적인 학문 방법을 본문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성격상 성경 역사는 성경 저자의 주관적 역사 철학서로써 색채가매우 강합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상황을 해석학적 적합성에 대한 비판적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늘의 한국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는 위험합니다. 특

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니까, 다윗이 행한 것은 모두 옳겠지 하고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시대 착오적인 태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한민족 통일 운동의 성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통일 신학 의 텍스트를 주로 교리서나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예컨대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에베소서 2장의 교회론을 다룬 서신, 또는 에스겔 37장의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서에서 택하고 있으나 역사서의 뒷받침이 지나치게 허술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가사울이 죽은 후,  ‘분열 -> 적대 -> 화합' 의 단계를 거치며 어떻게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었가를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구약 역사 중 거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에 통일 신학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텍스트입니다.

다윗의 지도력 아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법도에 기초한 통일 민족국가를 세운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가까이 독일 통일을 지켜보면서 과연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이 시점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윗 시대 이스라엘의 통일 운동과 우리의 현실과는 유사한 점도 적지 않으나 차이점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 저자의 입장은 주로 지도자의 인격과 경륜 등 인격주의, 기능주의적 통일 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독재 치하의 북쪽 현실에서는 적용이 가능하겠으나 남한의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남한의 경우, 국가 권력이 비교적 분산되어가는 조짐이 보이며 최고 통치권자의 통치 기간도 헌법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다윗의 통일 정책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한국 상황에서는 통치권의 당리 당략을 위해 역이용당할 수 있는 위험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과 아브넬의 회담은 지난날 자기들의 유신 정권 유지를 위해 밀사를 보내어 흥정을 한 후, 백성들을 철저하게 기만했던 분통 터지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본받을 일이라기보다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또한 군사력의 우위 유지 정책도 미국의 무기 산업 주도의 세계 질서에 교묘하게 이용당할 수 있을지도 모를 정책입니다.

어떤 점에서 다윗의 정책이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한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 통일론에 근접해 있어서 ‘맏형다운 입장 에서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분위기에도 알맞는 이론적 근거로 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분단상황이 현재 북한과 남한의 반세기 가까운 이념과 체제의 차이에서 나오는 분단 구조와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날 3 • 1 독립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듯이, 민족통일 운동에 기여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교회는 북한의 김일성 주체 사상이나 남한의 ‘천민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성경적이며 우리 상황에 가장 맞는 국가 체제를 지향하는 통일 강령을 민족 전체와 자손 만대를 위해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진보주의나보수주의 교회,할수 있는 대로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와 사회 과학자들까지 하나되어 평화통일 신학을정립해 7천만겨레 앞에 통일 조국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특히 보수 교회는 승공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정부 통일시책의 충실한후견인 역할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50~60년대의 북진 통일론, 70년대의 선의의 경쟁 관계론, 80~90년대의 상호 체제를 인정하는 화해와 공존의 연방제적 통일 정책에 거의 무비판적인 추종만을 거듭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 신학은 거의 북한 선교론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북한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남과 북이 에베소서 2장 12-18절에 나오는 교회론적 일치를 민족 통일의 차원에도 확대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통일 신학이 기도와 말씀과 선교의 범주에만 갇혀 있다고해서 신앙을 보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칫 관념론이나 이상론에 치우쳐 교회론을 무신론적 사회주의 국가 체제, 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나 내용적으로 세속적 자본주의 체제가 깊게 뿌리 내린 국가 체제에 적용한다는 것은 성경의 주제를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 각 권의 장르 비평으로서도 바른 적용이라 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적용하기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주장한 바를 참고하여 보수 교회도 통일 조국의 정치 이념, 구조와 체제 문제에 관해서는 사회 과학자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렴하고, 과감하게 교회의 새로운 지표를 설정하여 남과 북 '사이에’ 그 자리를 정해 기독교회가 남(南)의 전유물이 아니라 북의 백성들도 안심하고 ‘우리 것’ 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임을 행동으로 증거하는 모험적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남북한사회의 반(反)통일 장애 요소제거에 앞장서서 체제 정화에 힘쓰는 주도 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통일에 앞서 남한사회의 민주화, 경제 정의 실현을 통한 빈부 격차 해소, 범죄를 뿌리 뽑는 도덕성 회복, 정부와 국민의 신뢰성 회복 등을 위해 교회가 사회의 모범을 보이며 예언자적 기능에 더욱 앞장서야 합니다. 남한이 먼저 기본적으로 민주화, 복지화의 기초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이 이루어지면 무서운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셋째, 교회는 더욱 평화적인 민족 통일을 위해 만군의 여호과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진부하게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통일의 시기, 방법 등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린 것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통일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시대의 통일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불화로 구체화되었듯이, 독일의 통일이 소련이 연방 해체를 앞둔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서독의 경제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데올로기의 붕괴로 인한 국제 질서의 재편성의 기회로 얻어졌듯이, 어떠한 사회 과학 이론이나 신학 이론도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민족 국가의 분단과 통일, 흥망 성쇠, 왕의 즉위나 폐위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17:24)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17:26)

민족들이 이땅 위에 사는 동안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신(행 17:26)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만이 민족 통일의 마지막 열쇠를 가지고 계신 궁극적 권세이십니다. 통일의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한으로 정하십니다(행 1:7).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기도하고 준비를 갖추었나에 따라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인격적이고 전능하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지(요 2:3-7 참조), 기계적으로 확정해놓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

그러므로 통일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겸손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3~36)

우리가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일부 젊은 크리스천에게 있는 통일 유토피아주의입니다. 민족의 죄, 고통의 모든 원인을 오직 분단에서만 찾으려는 신학적 축소주의자들은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만 이룬다면 이데올로기나 체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까지 치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고 해서 당장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통일을 이루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 의가 실현될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간직하고 민족 통일 국가를 이땅에 이루가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면서 통일을 위해 현재 해야 할 일을 찾아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부르짖는 한을 어찌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눅 18:7). 우리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님’ 이십니다.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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