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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무엘하 11~13장 _다윗과 밧세바

by 비앤피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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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다윗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다윗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아끼던 믿음의 사람이 이런 끔찍한 것을 행하다니 믿기지 않는 충격입니다. 충신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하고 이방인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는 범죄로 인해, 다윗은 무서운 하나님의 벌을 받아고통의 세월을 살게 되며 그의 왕국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게 됩니다. 

현대 사회를 가리켜 누군가는 ‘섹스에 미친 세상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적 범죄를 가법게 여기는 풍조가 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성의 유혹에 넘어가신앙을 버리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위에 존경받던 신앙 지도자들까지 그만 성적 유혹에 넘어져 그 개인과 가정은 물론 공동체가 회복하기 힘든 고통을 겪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에서 공부할 내용은 성적 유혹과 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경고의 말씀이며 , 또한 어쩔 수 없이 유혹에 넘어져 범죄한 후 절망하는 죄인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은 진정한 회개와 영적 회복에 대한 값진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적 유혹

1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11:1~2)

밧세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이스라엘의 암몬 정복 전쟁 때였습니다. 다윗은 아마 전쟁 초기에는 출전했다가 겨울 휴전 기간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다시 따스한 봄이 돌아와 전쟁이 시작될 때였으나, 다윗은 이미 암몬 수도 랍바가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전선을 요압에게 맡기고 자신은 궁전에서 봄의 꽃향기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11:1)는 말을 덧붙여 다윗이 유혹에 빠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꼬집는 것 같습니다. 어느날 다윗이 왕궁 침실에서 시에스타(siesta)’ 를 즐기고 일어났는데, 황혼이 질 무렵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한 여자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눈에 비친 그 여자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이때 다윗이 과감히 눈길을 돌렸더라면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상당한 시간 동안 밧세바의 나체를 몰래 훔쳐봄으로써 성적 본능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런 습관을 '관음증'이라고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외설 사진, 그림책이나 음란 비디오, 영화 등이 마약과 같이 무서운 이유가 다윗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또한 저자가 전혀 여인의 책임에 대해 아무런 주석을 달고 있지 않지만 여자들이 몸가짐을 정숙히 해야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자정보원을 보내 그 여자에 대해 알아 보게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인데 ‘엘리암의 딸 곧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정치 고문 아히도벨의 손녀요, 충성스러운 30용사 가운데 한 명으로 암몬과의 전쟁에 출전중인 '우리아의 아내’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유혹을 뿌리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쾌락에 대한 황홀한 '상상력’ 에 빠져 정욕의 노예가 되어 비밀스런 자리를 만들고 끝내 간음을 저지르고 맙니다.

우리가 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으면 '성적 공상' 에 빠지기 쉽습니다(시 119:9). 아마 음란 문학이 정신 세계에 해로운 이유도 쉽게 우리의 상상의 세계를 추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위하기 전에 세 명의 아내를 두었고, 왕이 된 후 다섯 명의 아내외에 여러 명의 첩을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線) 을지키면서 부부가 성을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도하게 성에 탐닉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다윗은 성에 약한 기질을 타고났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공격적이고 정열적인 무인(武人)아나 다정 다감한 문인의 성향이 ‘로맨틱’한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일수록 성적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을 피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환경의 영향은 무서운 것이어서 눈에 안 보이는 독사가 생명을 질식시키듯이 영혼을 시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길은 성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그런 환경에서 용감하게 도피하는 것입니다(창 39:12).

또한 다윗은 많은 처첩으로 감각적 쾌락에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특히 나이들어서 ‘혼자서’ 다니면 위험한 사람입니다. 가정 환경을 건전하게 가꾸어 마땅히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저녁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바쁘게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는 사람일수록 고상한 취미와 건전한여가를 즐기는법도 평소에 익혀야 할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이 17-18년 왕위를 장기 집권하고 있는 동안 전쟁마다 승리하고 인기의 절정에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중단 없는 번영과 성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아 가장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축복을 얻기보다는 그 축복을 감당하기가 더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갈수록 전쟁터에 나가기보다 안일을 사랑하게 되었고, 마음의 빗장이 풀려 사단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보다성공의 때가더 위험합니다. 부지런히 최선을다해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자기 몸을 ‘의의 병기’ 로 사용하지 않으면 다윗도 우리도 타락한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을 극복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창 4:7, 고전 9:27 참조). 그러므로 우라가 일생 동안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사욕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2~13)

범죄 은폐

밧세바가 임신하자 어쩔 수 없이 그 소식을 다윗왕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때부터 다윗의 마음에는 평화가 사라졌고, 밧세바에게는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윗은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전장에서 소환해 특별 휴가를 주어 아내와 동침시키려 했습니다. 특별 휴가에다 술과 기름진 음식으로 대접 받게 되면, 나른해지면서 긴장이 다 풀리는 법인데도 우리아는 아내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며 결코 타협하지 않는 참으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군인이었습니다.

11우리아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삼하11:11)

어떤 점에서 우리아는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지난날의 다윗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현재의 다윗은 타락했으나 아직도 그의 용사들은 위대했습니다. 우리아를 소환해온 의도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이제 다윗이 취할수 있는조처는 한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일생을 바쳐 자기에게 충성해온 우리아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잘못 디딘 발걸음이 더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다윗을 끌고가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고, 일생 동안 쌓아올린 명예를 한순간에 더럽혔습니다.

14아침이 되매 다윗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삼하11:14~15)

다윗은 죄를 숨기기 위해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아는 하나님께 대해 경건했고 왕과 요압 사령관에 대하여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그 모습이 독자들을 더 슬프게 합니다. 요압도 '불의로 당을지어’ 다윗의 하수인이 되었으나, 아마 그 이후로 다윗에 대한 존경심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밀령을 스스로 가지고 가서 요압에게 전달한 우리아는 억울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악인들의 음모에 의인이 이처럼 죽는 일이 역사 속에, 그리고 우리의 현실 속에도 얼마나 비일 비재합니까. 하나님께서도 왜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지 불만스럽지만 사무엘서 저자는 끝내 이 의문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이루어냈습니다. 물론 밧세바에게는 알리지 않고 행했을 것입니다. 우리아의 장례가 끝나자 안심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데려왔고 후에 자식도 낳았습니다. 왕의 권세가 국법 위에 있던 당시 주변 국가의 관례를 생각하면 다윗이 특별히 악한 왕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어떤 식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었는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사람과 달랐습니다.

27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11:27)

일생을 통해 하나님과 숨결을 같이하듯이 사랑으로 교제하던 기도의 사람 다윗, 하나님을 찬양하는 숱한 시를 쓴 위대한 시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공과 의로 다스리던 사랑과 평화의 왕 다윗,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까지도 거친 정욕의 포로가 되어 파멸의 시궁창에 빠진 사실 앞에서 우리도 마이어(F. B. Meyer)와 함께 두려움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떡해야 합니까?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제가 그러한 틈이나 흠없이 달려갈 내 인생길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 마지막 그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는 인생의 새하얀 꽃을 피울 수 있게 도와주소서”

심파의 메시지

범죄한후에도 다윗은 1년 정도를 회개하지 않고지낼 수 있었습니다. 왕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자기 범죄는 역사 속에 영원히 은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죄 의식이 괴롭힐 때마다 또다른 쾌락이나 일에 몰두함으로써 도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이중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양의 가책은 갈수록 거세어갔던 것 같습니다. 이중 생활의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 다윗은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내면의 갈등과 영혼의 신음을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내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종일 신음하다가 지쳤습니다.
4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시므로 여름의 뙤약볕에 물이 말라 버리듯 내 기력이 쇠하였습니다.
(시32:3~4, 현대인의 성경)

다윗은 열방과 같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스스로 회개할 능력조차 상실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를 빼앗아간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게 하셨습니다. 당시 왕은 얼마든지 예쁜 처녀들을 아내나 첩으로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아의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아간 죄를 비유로 깨우쳐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인정 많은 다윗은 노발 대발하며 그 악한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개 거짓되고 교만한 지도자일수록 남은 잘 판단하나 자기는 예외라고 핑계하는 위선에 빠집니다. 이때 나단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숨을걸고 왕에게 정면 도전하여 죄를 지적했습니다.

7나단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삼하12:7)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특히 왕들의 권력 남용이나 권력 오용의 죄악을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종들이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주관적으로 적용시키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오셨는가를 가슴 아프게 상기시킨 후 그의 죄를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9)

사람 앞에서 죄가 숨겨질 수 있고,양심도 점점 무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품고 있는 것은 마치 암세포나 나병균 같아서 그 영혼을 죽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치료의 하나님 앞에서 죄가 노출되고 수술받아야만 그 영혼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회개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회개의 복음을 증거하게 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단호하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사람 우리아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하12:10~12)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은 가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남의 가정을 파괴한 다윗의 가정에 처참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13장을 보십시오. 첫번째 사건이 그의 딸 다말이 이복 오빠 암논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아에게 아내를 빼앗는 자기 아비의 짓과 비슷합니다. 그리고나서 암논은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에게 피살 당하였고, 그후에도 압살롬의 반역과 참혹한 죽음(18:14), 그리고 솔로몬에 의한 아도니야의 처형(왕상 2:25) 등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문자 그대로 집행되었습니다.

더구나 다윗이 은밀하게 범죄한 죄를 대낮에 많은 공중 앞에서 다 드러내고 응징하겠다는 예언을 압살롬의 짐승보다 더 추악한 행위를 통해 성취시키셨습니다(16:22). 죄악에 대해 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기필코 그 책임을 추궁하며 공의를 실현시키시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죄 고백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다윗은 나단 선지자 앞에서 비로소 숨겨온 죄를 고백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칠 때 가리워진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듯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 같은 죄도 숨길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조명으로 진정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진실을 되찾아 숨김없이 죄를 토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신실함에서 드러난다면, 사람의 진실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요일 1:8~9). 그후 다윗은 참회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시는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2, 10, 17)

사죄의 은총

통회하고 자복하여 죄 씻음 받은 다윗은 이렇게 죄사함 받은 은총을 찬양합니다.

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32:1~2, 5,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마땅히 죄와 싸우되 아직 피홀리기까지는 대항(히12:4)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와의 싸움은 첫째, 범죄하지 않으려는의지적 결단이요, 둘째, 범죄 후죄를고백하지 않고 숨기려는 거짓과의 싸움이며, 마지막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과거의 죄책이 되살아날 때 나는 죄를 기억하나 하나님께서는 기억도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사죄의 약속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시 103:12, 사 44:22, 롬 6:11~13 참조). 하나님의 사죄 선언은 즉각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얼마든지 용서해주십니다.

13다윗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삼하12:13~14)

다윗의 범죄는 사함 받을 수 있었으나 그 죄의 열매는 자신이 책임져야 했습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다윗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뿐 아니라죄에 대한 저주까지 대신 담당하셨다는 교리를 믿기 때문입니다(갈 3:13).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아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우주의 도덕적 원리가 남아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갈 6:7~8).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팽개치고 죄를 지어도 고백만 하면 용서해주신다는 생각으로 습관적으로 죄악된 생활을 계속한다면 그 결과가어떻게 되겠습니까.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사죄의 교리만 악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롬 6: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 순간적인 쾌락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죄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사랑의 채찍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심히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죽음을 맞는 다윗은 놀랍게도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윗은 아기가 아플 때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애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죽자, 오히려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었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다윗을 모시던 신복들이 의아하여 물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됨이니이까"(12:21).

이때 다윗의 대답은 영적으로 회복한 다윗다운 깊은 신앙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22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12:22~23)

자기 죄 때문에 무죄한 자식이 대신 고통 1명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괴로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자식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다윗을 용서하셨으나 동시에 엄위하신 분이심으로 사랑의 매를 들고 계신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 낳은자식은죄와 수치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나, 다윗과 밧세바를 위해서나, 이방 세계에 추락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나 그 아기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것이 일시적인 고통은 따르지만 후에는 유익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사생아처럼 내팽개치시지 않고 참 아들로 삼으려고 하나님 자녀다운 인격을 빚기 위해 견책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찬송가 317장 가사대로,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아버지는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잠시 우리를 징계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징겨ᅵ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그 징계가 달갑지 않고 괴로운 것 같지만 후에 그것으로 단련을 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안의 열매를 맺습니다 (히 12:10~11,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여 의의 평강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인자한 어머니의 사랑과 엄격한 아버지의 징계가 있는 가정 분위기는 아이의 인격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에도 반드시 “아무나 와도 좋소"의 은총과 "회개시키며 권징하는" 성결이 동시에 있어야만 합니다 현대 교회가 권징의 성경 진리를 회복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의 거룩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며, 교회 내부나 사회에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증거

어린 자식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매를 때린 부모가 아이를 다시 품에 안고 위로해주며 사랑을 확인시켜주듯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징계한 후 사랑을 확증시켜주셨습니다. 회개하고 새로워진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아들을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식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었는데 '샬롬', 즉 평화라는 히브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의 이름에는 부모의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윗 자신은 무죄한자에그적도 있고 전쟁터에서 많은 피를 홀려 왕국을 세웠으나 너의 시대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는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또 성전을 건축할 평화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불화가 끝나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롬 5:1),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기념해서 지은 이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나단을 보내서 솔로몬의 이름 '여디디야' 라고 지어주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을 확인시켜주신 셈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전인격적으로 체험한 다윗은 죄악의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 사라졌을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내면에 충만할 때 그 표현은 죄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관계의 사랑도 증거가 있어야만 확인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 없이 깨닫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롬 5-8).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주신 사건을 통해 다윗과의 사랑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서 저자는 솔로몬이 장차 다윗의 왕조를 계승할 자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음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영성

다윗과 밧세바 사건을 공부하면서 이는 그저 재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지나칠 수 없고 바로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다윗 같은 신앙의 거장도 넘어졌다면 감히 어느 누구가 ‘나는 선 자 (고전 10:12)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물질의 풍요와 섹스의 상업화, 개방 풍조로 이 시대는 노아(창6장)나 소돔과 고모라 시대(창19장)를 방불케 하는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다윗이 걸려든 덫이 무엇이었나를 돌이켜보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점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레 11:45).

다윗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작은 동물적 본능에 몸을 맡기고 만 근본 이유는 영성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지적한 다윗의 실패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12:9)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12:10)

결국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삼상 2:30). 다윗이 십계명의 제6계명과 제7계명을 몰라서 살인하고 간음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하려는 '영의 소욕' 보다 죄의 유혹에 이끌리는 '육의 소욕' 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었습니다(갈 5:16-26).

크리스천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영과 육의 소욕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내 속에 늘 죄를 좋아하는 육신의 욕구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뚯을 좋아하는 영의 욕구가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땅 위에 사는 동안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성결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는 죄성을 죽여야 하며 적극적으로 영성을 개발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죄성을 죽이는 과정을 성경에서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죽이면 살리니”(롬8:13)고 표현했고, 영성 신학에서는 ‘죽임 (mortification)’ 이라는 말을 씁니다. 절제나 금욕주의라는 말이 현대에는 결코 쓸데없는 낡은 말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영성 개발에 대해서는 교부 시대나 중세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훈련 방법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현대의 고전이 된 포스터 (Richaid Foster)의「영성 훈련의 기쁨」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면적 훈련 一 묵상, 기도. 금식. 공부

외면적 훈련 一 단순. 고독. 순종. 봉사

공동체적 훈련 一 고백, 예배. 인도. 잔치

이러한여러 영적 훈련들은사도 바울의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5)라는 말씀에 의지해 어떻게 하면 육을 입은 인간이 초월자이고,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영적인 ‘사모함' 또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요 선지자요 시인이며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윗의 성적 타락은, 이스라엘 땅을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한 (레 19:29)사회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나라를 이루었던 다윗이 범죄하자, 그의 가정과 국가가 모두 음욕과 살육의 난장판으로 화하는 것을 13장 이하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의 성적 타락, 그리고 가정의 파괴, 젊은 학생들의 성 도덕의 무너짐은 너무나 무섭게 번지는 전염병 같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으로서 이 시대를 섬기는 길은 우리 모두가 먼저 개인 생활뿐 아니라 가정 생활, 사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성령 충만한사람들이 되어서 ‘영풍'으로 '음풍'을 몰아내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음란 서적, 음란 비디오 등 음란 문화의 도구들을 축출하는 운동에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준 사도 바울의 권면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딤전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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