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21:17) |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13:36) |
본문은 엄격히 말해서 다윗의 말년에 대한 기록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사건 중에서 몇 가지를 연대와 상관없이 부록으로 편집해놓은 것입니다. 그냥 읽기에는 아무런 통일성도 없이 마구 엮어놓은것 같으나, 깊이 살펴보면 부록 속의 여섯 주제가 문학적 구성에 있어서나 신학적 중요성으로 보아 ‘다윗의 통치 기간에 대한 적합한 요약 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구약에서 흔히 발견되는 ‘a-b-c-c-b-a’의 교차대구법적 문학 양늬을사용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와 마지막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사건들이요(21:1-14, 24:1-25), 두번째와 다섯번째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이며(21:15~22, 23:8~39), 가운데는 다윗의 시 두 편이 나오는데 앞의 것은 다윗의 승리의 노래이고, 뒤의 것은선지자적 예언의 시입니다. 이 두편의 시가부록의 중심이 됩니다.
사무엘서는 한나의 노래로 막을 올리기 시작해 다윗의 승리의 노래로 막을 내리는 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다윗의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지도력의 편린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백성의 한을 풀어주는 왕
21장 앞부분에는 억울한 일을 당해 원한을 품고 있는 기브온 사람들과 사울의 첩 리스바의 슬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본래 가나안 족속인데 여호수아를 속여 조약을 체결해 이스라엘에서 머슴살이하며 살도록 허용된 소수 민족이었습니다(수 9:3~27). 서원했으면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아야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시 15:4). 그런데 사울은 히틀러 같은 민족주의적 광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21:2, 5).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자가 압박당할 때 그 억울함을 반드시 갚아주십니다(시 10:18). 그래서 3년간 이스라엘에 기근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생명을 생명으로 갚는다’는 하나님의 규례대로 사울의 자손 7명에게 사형을 집행하게 했습니다(민 35:29-34). 아마 죽임 당한 7명은 그 사건에 직접 책임 있는 자들로 추측됩니다. 이로써 기브온 사람들의 한은 풀렸으나, 두 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잃은 리스바의 비통함은 풀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그 시체를 당일에 장사해야 했습니다(신 21:23).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받고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갈 3:13).
그런데 자식들의 시체를 장사지내주지도 않자, 리스바는 굵은 삼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깔고 추수가 시작된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질때까지, 낮에는 시체에 독수리가 앉지 못하도록 하고 밤에는 맹수가 달려들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광주 항쟁 때 손이 뒤로 묶인 채 총에 맞아 죽은 어느 전남대생의 어머니가 달밤이면 망월동 묘지에 가서 묘를 파 구멍을 내고 아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는 그 한맺힌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윗은 리스바가 행한 일을 듣고서 죽은 사람들의 뼈를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같이 묻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억울한 일을 당한 소수의 약자들과 슬픔 많은 한 여자의 한을 풀어주었습니다. 리스바가 사울의 첩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타고난 미모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사울의 첩이었기 때문에 아브넬에게서 욕을 당했었고(삼하 3:7), 두 아들의 참혹한 죽음까지 목격해야 했습니다. 세상을 잘못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통치자의 할 일이 바로 이런 소외 당한 자, 억울한 자, 원한을 품고 사는 자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백성들의 눈물을 씻겨주며 한을 풀어준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셨습니다.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삼하21:14) |
왕은 이스라엘의 등불
21장 후반부에는 블레셋의 거인들과 싸워 이긴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윗의 나이가 60대쯤 되었을 때입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이스비브놉에게 죽기 직전 아비새가 잽싸게 가서 블레셋 거인 장수를 쳐죽이고 다윗을 구출했습니다. 그 건 후 용사들이 다윗에게 간청했습니다.
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21:17) |
다윗의 부하들에게서 ‘이스라엘의 등볼 로 높임 받는 것은 결코 그의 처세술이나 여론 조작 기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22:29)라고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요, 어두운 시대를 살며 절망하기 쉬운 백성들을 공의와 사랑으로 보살피며 다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성공과 번영을 자기 공로로 삼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지만, 두번째는 아둘람굴 시절부터 자신의 약점을 감당하면서 충성해준 용사들의 공으로돌립니다. 다윗의 위대성이 바로 이러한지도력에 있습니다. 사무엘하는 어느 성경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자기 동역자들의 이름을 수없이 기록해놓은 것을 연상시킵니다. 23장 뒷부분에 나오는 세 용사들 이름에는 헷 사람 우리아도 있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을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동역자들의 귀중함을 인정해주는 것은 훌륭한 지도자의 인격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그리스도의 황금률은 주님의 교회에서나 일반 사회에서나 그대로 적용될 진리입니다. 다윗은 동역자들을 귀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등불 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왕의 노래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을 주로 용맹스런 무인, 탁월한 통치자로서의 모습만을그렸습니다. 얼핏 다윗이 수금 잘 타는 음악가요(삼상 16:18),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애가를 지은 시인이라는 것을 언급했을 뿐입니다(1:17-27). 그러나 현대인에게 다윗은 시인으로 더욱 기억되고 있습니다. 생애의 황혼기에 지난 날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일이겠습니까.
사무엘서 저자는 22장의 시가 다윗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 시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수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 다윗의 생애 가운데 어떤 사건을 경험한 후 쓴 것인가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시가 ‘다윗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주석’ 이라고도 했습니다. 내용을 묵상해보면 다윗의 생애보다 ‘다윗의 하나님' 이 주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의 앞 부분(1-2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비롯한 외적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압살롬 같은 내부의 적에게서 더 큰 구원을 맛보았습니다. 다윗은 군사적 천재이기 때문에 원수들에게 승리한 것이 아니라 권능과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방패
나의 높은 밍대
나의 피난처
나의구원자
다윗의 모든 관심은 이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찬양할 수 있을까에 집중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좋으신 분인데, 자신이 빌려쓸 수 있는 언어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 몹시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 (벧후3:18) 모습처럼 멋있고수준높은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의 원수가 형식적으로는 인간들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사망 권세’ 였습니다. 5절에서는 사망 권세를 마치 광풍이 몰아치는 대양으로, 6절에서는 사냥꾼이 놓은 사망의 올무 로 그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 ‘파멸의 홍수' 와 '사망의 덫’ 에서 구원하여주겠습니까?
7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22:7) |
인생의 황혼에 아스라히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환난중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하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다윗의 눈망울에는 감사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다. 그는 8-16절에서 하나님을 기리면서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강림’(10절), ‘나타나심’(11절)과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에 개입하여 자신을 ‘건지셨음 (18절)을찬양합니다.
20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삼하22:20) |
이 시에 담겨 있는 다윗의 고백 가운데는 어찌보면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인을 둔 사람이 “그이가 날 사랑하는 건 너무나 분명해” 하고 자랑하는 것이 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결코 부인할수 없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구원하심을 찬양합니다. 특히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승리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21-25절에서 마치 자기 의를 뽐내는 듯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다윗이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24절)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거부감마저듭니다.
거듭 말하지만 구약을 공부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말은 ‘언약'이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만민 중에서 선택된 민족으로 하나님과 독점적인 관계를 갖기로 언약을 맺은 사이밉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제물을 바칠 때 이미 죄사함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카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47여호와는 살아 계신다! 나의 반석 되시는 분을 찬양하세. 내 구원의 바위 되시는 하나님을 높이세.(삼하22:47,현대인의 성경) |
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의 첫 마디가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 17:26)였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출발했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여 완숙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기 삶의 구석 구석에서 체험한 다윗은 확신 있게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었습니다.
51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삼하22:51) |
노래의 절정에서 다윗이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삼 입니다. 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다윗이 숨질 때까지 부르고 또 부를 찬송 제목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말
“나는 누구인가"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에서 다윗은 자기를 가리켜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높이 들리운 자' - 보잘것없는 신분인 이새의 아들로 태어나 목동의 자리에서 왕이라는 높은 위치에 오른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받은자 - 하나님의 택함받은왕.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자 - 성경에 기록된 시편 150편 중에서 73편을 쓴 시인, 다윗의 마지막 말 이란 문자적으로 유언이란 뜻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2장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마지막으로 쓴 시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자신의 시가 ‘여호와의 성령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23:2, 현대인의 성경)것이므로 시편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어느 책보다도 유대인이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책이 시편입니다. 또한 23장의 시는 다윗이 예언자로서 자기 생애를 요약할 뿐 아니라, 멀리 메시야 시대를 비전 가운데 내다보며 예언한 말씀입니다(행 2:29~3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참조).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23:3~4) |
독재자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참혹하게 죽은 후 이스라엘이 겪은 혼란과 분열, 주권 상실의 질곡은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 이어 왕이 된 다윗은 즉위 40년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존중함으로 다스려 왕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어두운시대에 ‘돋는 해, 아침 빛'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추어 답답한 그들의 마음을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아침 같은 시원한 정치를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백성들에게 꿈과 비전을 품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는 국가 공동체를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다윗의 왕도는 메마른 백성들의 마음 밭을 일구어 희망의 씨를 심었고, 그 씨가 파릇 파릇 돋아나는 새싹이 되어, 후에 자손 만대에 이르러 행복의 열매를 거두도록 돕는 이른 비와 늦은 비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통치 말기에 겪은 암울한 반역 사건들을 돌이켜보며 자신의 왕도가 결코 완전 무결한 통치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궁극적으로 장차 올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갑니다. 그러나 자기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영원하며 진실하신 분이심을 알기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그분의 언약에 두고 있습니다.
5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23:5) |
다윗의 공로와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이스라엘은 민족의 주체성과 번영을 칭송했습니다. 그를 시조로 다윗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인간의 행위에 소망을 둘 수 없음을자신의 인생 경험을통해서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 왕조는 무려 400여 년을 이어나갔습니다. BC 586년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이어갔지만, 끝내는 ‘다윗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 사악한 후손들 때문에 그의 왕조 역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희랍,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세상 권세에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끊임없이 압제를 받으며 절망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래도 희망의 심지를 돋우워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운 명원한 언약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때가 차매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셔서 23장 3-4절과 이사야 11장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8-79)라는 다윗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이 메시야 시대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영감 넘치는 시편과 그의 영원한 왕조, 곧 메시야 통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사무엘서의 마지막 장은 왜 좀더 그럴 듯한 사건으로 장식하지 않고, 하필이면 다윗의 실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을까요? 그러나 인간의 죄와 실수를 통해서도 성전의 터를 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을 펴보이는 본문의 사건은 마치 여백을 많이 둔 동양화처럼 독자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새겨줍니다. 어느 학자는 이 부분이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 라고 합니다.
24장 앞 부분은 다윗이 인구 조사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습니다. 1절과 10절 말씀입니다.
1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24:1) |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자 다윗은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충동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신 이유는 자신이 택한 왕을 반역하고 압살롬과 세바를 분별 없이 따른 죄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람을 범죄하게 하시지는 않았지만(약 1:13-15), 인간의 악행까지도 신비스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은 분명한사실입니다(출4:21, 수 11:20, 왕상22:22-23, 행4:28참조).
그런데 인구 조사가 왜 잘못입니까? 다윗이 양의 가책을 느껴 회개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10절)? 민수기를 보면 군사력의 효과적 운영을 위해 인구 조사는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구 조사 자체보다는 그 마음의 동기가 문제였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후 무너진 왕권을 센서스를 통해 더욱 확고히 장악하려는 의도였거나, 아니면 노년에 과거 업적을 회상하며 자기 영광을 구하려는 다분히 자기 도취에 빠져 행한 일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사람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삼상 14:6, 삿7:4 참조).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교인수를 의지하는 ‘심히 미련하게 행하는’ 일이 혹시 우리 주위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음의 천사'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를 듣고 그 성을 보호하십니다. 예루살렘성에 사는 백성들이 무죄했다거나 그 성 자체에 무슨 공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라우나 타작 마당의 제단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시간 안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경이요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의 전염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놀랍게도 자손 만대에 하나님을 경배할 성전터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성 바로 근처에 있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값을 주고 타작 마당과 제물로 드릴 소를 샀습니다. 후에 이 타작 마당이 솔로몬의 장엄한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가 될 줄이야 감히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서는 다윗 왕이 성전 터를 사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24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24:24~25) |
어떤 주석가는 아라우나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전, 최후의 여부스왕이 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라우나 는 왕의 칭호이고 이름은 ‘오르난'으로 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정복 후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아라우나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작 마당과 제사에 사용할 모든 것을 기쁘게 헌납하겠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타작 마당을 살 때 이곳이 성전 지을 터가 되리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제단을 쌓고 속죄 제물을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위에 불을내려 응답 '(대상21:26)하심을 체험한 후, 이곳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만대에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터로 적합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장소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개 타작 마당은 가벼운 미풍이라도 이용하기 위해 높은 지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북쪽 기드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전을 짓는다면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후에 무려 금 600세겔을 주고 타작 마당뿐 아니라 그 주위 토지 전체를 아라우나에게서 매입했습니다(대상 21:25).
이곳이 바로 모리아산이었습니다(대하 3:1).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칼을 뽑아 들었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라는 메시야적 언약을 받은 그 역사적인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1000년을지척에 두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앙의 손을 맞잡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성전 건축 준비
다윗은 압살롬 반역을 진압한 후 약 10여 년의 노년을 비교적 조용히 보낸 것 같습니다. 이 기간중에 다윗은 큰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힘썼습니다. 시편 131편에는 이러한 다윗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131:1~3) |
다윗은 청장년 시절에 ‘큰 일’ 과 기이한 일’ 에 힘쓰며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 참 평안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활동에 걸맞는 내면의 인격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밖으로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될수록 그의 영혼 깊은 곳에 공허감만 쌓였던것 같습니다. 외부 지향적인 인생을 사는 자들의 공통적 모습이 세상에서는 성공했는데 그의 사생활,가정 생활,자녀 교육에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풀무 속에서 연단받은 후에야 다윗은 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모든 탐욕의 사슬에서 풀려나 '비움'의 충만함과 '낮아짐’ 의 드높은 영적 비밀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며 그분으로만 만족했습니다. 하나님 +알파를 동시에 추구하던 삶에서 알파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영혼에는 끝없는 생수의 강이 홀러넘쳤을 것입니다(요 7:37-39).
때로는 물러가야 할 시기에 물러가지 못해서 말년이 추해지는 사람들을 사회 여러 곳, 심지어 기독교계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기 당대에 해야 할 일과 후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역사적 시야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죽기 전에 미리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그에게 왕도를 훈련시키며 배후에서 얼마동안 돌보았습니다(대상 23:1). 특히 솔로몬으로 하여금성전 건축의 비전을 갖도록 신앙적으로 격려했습니다.
그후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후손을 위해 할 일감을 찾아 묵묵히 그 일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 일이 바로 솔로몬 대에 지을 성전 건축 준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 온 백성이 찬양하고 경배할성전, 성서 이스라엘의 기초가 될 율법이 홀러나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꿈이었고, 다윗이 당대에 성취하여 자기 이름과 업적을 길이 남기고 싶은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후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자기 아들의 대에 이르러 무리 없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그리고 묵묵히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자기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맡길 줄 안 다윗의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짓게 했습니다(출 25~31장, 35~40장). 광야 생활중에도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는 영구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의 구체적 설계를 알려주고, 평화의 왕 솔로몬 시대에 지을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건축 자체에만 7년(왕상 6:38), 건축자재 준비에 7년이 소요되는 당시 이스라엘 국력으로는 엄청난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물질적 준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 후, 경건하고 위엄 있게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할 3만 8천 명의 레위인을 임명했습니다. 다윗이 제사장의 임무 교대 순서의 체계를 얼마나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잡아놓았는지, 1000년 후까지도 변경없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이 당번 조직표에 의해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정도였습니다(눅 1:8~9). 또한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조직표를 짜놓았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단지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종교적 열심으로만 몰아부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정 조직면, 예술적인 면, 특히 재정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까지 차분히 세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신앙적 정열과 현실적 정치력, 행정력이 무르익은 다윗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채석장을 두어 미리 치수를 갖추어 돌을 깎은 다음, 성전 건축 장소로 옮겨와 전혀 망치 소리나 소음 공해 없이 하나님의 전을 짓게 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금, 은, 동, 철, 보석 등을 축적했고, 외국의 최고 기술자들과 목질이 뛰어난 레바논의 백향목 자재를 수입했습니다. 목재를 옮기는 데만 8만 명을 동원했으니 얼마나 거대한 공사였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금, 은을 모아둔 것만 계산해도 1896년 시세 약 1,000억 불 정도였으니 당시 이스라엘의 국제 수지 흑자가 얼마나 엄청났으며, 다윗의 경제 정책과 운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이 왕궁이 아니라 성전이 되도록 미리 힘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감정과 욕심대로 사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백성이 될 것을 비전 가운데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나 미가는 장차 다윗 같은 메시야가 세상을 다스릴 메시야 시대에 세계 만민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가 될 날을 예언했습니다(사 2:2-4, 미 4:1-3).
이러한 비전을 함께 나누면서 백성들의 성전 건축 역사에 참여 의식을 높이기 위해 그들에게도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온 백성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한 예물을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윗은 감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1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4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대상29:11,14~15) |
위의 기도를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십시오. 다윗은 광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덧없음을 깊이 알았습니다. 자신과 자기 백성이 이토록 풍성히 바칠 수 있는 재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것을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힘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생이 이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며, 세상에 사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이 세상에는 별로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잠깐 왔다 가는 인생이 다음 세대에 자신이 살던 세상보다는 더 좋은 세상을 유산으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얼마나 보배로운 일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과 후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전터를 마련하는 사건으로 사무엘서는 끝을 맺습니다.
다윗의 유언
사무엘서의 연속편인 열왕기서는 “다윗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왕상 1:1)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나그네와 인 같은 인생길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습니다. 죽음을 앞둔 다윗은 솔로몬을 불러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1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왕상2:1~4) |
대개 사람이 임종을 앞두면 마지막으로 신기한 힘이 생겼다가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다윗도 소진한 육체의 마지막 힘을 모아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좌우명으로 삼았던 값진 교훈을 솔로몬에게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지켜 행하라.” 그리고나서 솔로몬이 장차 감당하기에는 벅찬 위험 인물들 곧 요압, 시므이를 처단하여 왕국의 안정을 이룩할 것과, 피눈물 홀리던 고난의 날에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 것을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10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왕상2:10) |
구약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부활에 대한 신앙이 신약 시대만큼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다윗은 메시야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며 그 희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다윗으로 하여금 늘 기쁨을 주었고,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고후4:16) 인생을 살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부활 신앙은 시편 16편, 17편에 가장 뚜렷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8~11) |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
신구약을 통해서 신자의 육체적 죽음을 잠잔다 고 말한 것은 얼마나 의미 심장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고단한 몸이 달콤한 잠을 자고 난 후 살포시 깨어날 때의 그 신선함! 육체의 낡은 장막과 그 장막에 거하는 동안 우리를 탄식하게 하던 모든 무거운 짐, 고통의 멍에를 벗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형상으로 깨어나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시던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며, 그분의 품안에 안길 벅찬 기대와 소망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성도의 죽음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겠습니까.
다윗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서 다릅니다. 다윗의 일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그의 생애에 대한 가장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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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공의와 정의, 사랑과 평화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뿌리(계 22:16)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죄와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십니다(계 19: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더이상 죄도 질병도 눈물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빛과 생명의 나라입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삶처럼 아름다운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그 모습에 험악한 세월이 안겨다준 독버섯이 사망의 그늘처럼 저승꽃처럼 얼룩진 어두운 말년이 아니라,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분의 삶을 더욱 닮아가며 하늘의 영광이 환하고 따스하게 그 심령을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참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찬송가 저자는 이렇게 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본받아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찬송 507장 1절). |
다윗은 그 시대에
다윗의 일생에 대해 후대의 역사가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열왕기 사가와 신약의 역사가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1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왕상2:11) |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13:36) |
다윗의 생은 이 세상 어느 영웅 신화보다도 더 파란 중첩한 극적인 생애였습니다. 거친 들판에 핀 들꽃을 보며 양을 치던 목동이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거꾸러뜨리고 일약 군장이 된 소년 시절, 사울의 곁에서 수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불러주며 총애를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죄 없는 범법자로 낙인 찍혀 도괴와 망명의 광야 생활로 보낸 청년기, 그후 분열된 조국을 통일시키고 공의와 사랑의 나라를 건설하며 뛰어난 왕도를 발휘했던왕으로, 충신의 아내와의 간음으로 자식에게서까지 배신당하면서 통곡과 참회의 뼈아픈 피난 생활을 보내야 했던장년기,왕권 회복 후조용하게 영감 어린 시를 쓰며 자손 만대를 위한 성전 건축 준비로 벅찬 꿈과 희망 가운데 보낸 노년기 - 돌고 휘며 구부러지는 생의 유전속에 막힐 듯 막힐 듯하면서 이어진, 다윗의 생을 일관한 덜’ 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영원합니다. 유한한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땅 위에 생명을 누리고 있는 동안 자기 인생과 당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다가 잠드는 것처럼 고귀한 생애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 국가 공동체는 모두 그 시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하는시대적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존재 의미와 그 가치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역사에 무관한 생, 공동체는 모두 풀이나 꽃과 같이 얼마 가지 않아 허무하게 사그러져버릴 것입니다.
다윗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성서 이스라엘을 이루고 메시야 신앙을 후손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죽은 1000년 후 그의 자손으로, 그의 동네 베들레헴에 오셔서 온 인류의 메시야가 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다가 잠들어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썩지 않았습니다. 능력으로 죽은 지 사홀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신 것입니다.
우라는 이 시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다윗과 함께 고백해야 합니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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