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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일 _다윗과 사울 _사무엘상 16장 14~23절

by 비앤피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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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사울 왕의 삶은 황폐해졌다. “사울에게서는 주의 영이 떠났고,그 대신에 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삼상 16:14). 그의 정신과 정서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사울이 처음 성경 이야기에 등장할 때의 모습은 굉장했다. 그는 엄청난 장신(평#)에다가 사랑스런 겸손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무엘이 그에 대해 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주께서 뽑으신 이 사람을 보라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이 없다.” 백성들은 이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열광적인 함성을 질렀다. “임금님 만세 !”(삼상 10:24) 모든 것이 밝은 내일을 약속하는 듯했다.

시작은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된 영예와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늘 하던 농부 일을 계속했다. 사울이 ‘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특권의 자리로 여기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왕이라고 해서 노동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고, 사울이 백성들에게 군사 원정을 통해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자고 소리를 높였을 때,백성들은 한 사람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일사 불란하게 그에 옹했다. 즉위식 때 보여 주었던 충성심 그대로 어떠한 위험 속이라도 그를 따르겠다는 각오를 보여 준 것이었다.

첫 번째 군사 활동,즉 암몬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 내는 일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암몬에 이어 블레셋 족속을 패배시키는 일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사람들은 점차 사울이 장군으로서 탁월할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숭리 직후,열광적인 충성심으로 사울을 추종하던 무리는 전에 그가 왕으로 뽑힌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쓰레기 같은 놈들’ 을 다 쓸어 버리자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사울은 은혜와 관용의 정신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울은 어떤 적과 싸우든 그들보다 우월했고 연숭을 거두었다.(삼상14:47)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음을 암시하는 징후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울이 잔인한 블레셋 족속과 야비한 아말렉 족속을 얼마나 멋지게 대파했는지를 말해 주는 이야기에서,우리는 사울이 비록 지도력과 매력을 겸비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음을주는 표지들을 발견한다. 그는 점점 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 자체는 잘 풀려 갔다. 믹마스에서 블레셋과,그리고 시내산 지역에서 아말텍과 붙었던 전투는 완벽하고도 만족 스러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사울은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저질렀고,사무엘은 이를 지적하며 사울과 맞섰다(삼상 13:13: 15:19). 사실 겉으로 보기에 그 두 번의 불순종은 죄가 아니었다. 부도덕하거나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두 번의 행동은 모두 지극히 사리에 맞는 행동이었다 사실 그 두 행위는 모두 군사 전략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여기서 흥미롭고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그 두 번의 불순종이 모두 예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저지른 불순종은 사울이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투를 준비시킬 목적으로 임의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었고,아말텍과의 싸움에서 저지른 불순종은 사울이一아말텍과 그 모든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一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그 짐승들을 희생 제사용으로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아니 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사울이 백성들에게 부화 뇌동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놔두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마음이 그런 행동의 동기였던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사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첫 번째 동기는,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단합시키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동기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사울은 일을 잘 하려고 노력했고,일을 잘 하고, 좋은 왕이 되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보전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행동이다. 사울은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방법으로 대우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때인가부터 스스로 주권을 책임지는 것이 그의 일이 되어 버렸다. 왕으로서 정치하는 일에만 빠져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완전히 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행동이 보여주듯,그에게 예배와 일은 별개의 활동이 되어 급기야 후자가 전자를 부리게 되었다. 즉 일을 위해 예배가 도구화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는푠았다(반대로 예배를 위해 일을 도구화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과 예배,예배와 일이 완전히 일차룬 삶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시다. 인간의 일은 일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일하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일하시는 하나님,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일에 착수하셨다. 엿새 동안 일하고 마지막 날 예배하는 삶은 피조 세계의 전체 영성을 이루는 기본 틀로서,일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다(창 1:1-2:2). 번째 창조 이야기를 보면,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산에서 일할 일꾼으로 부르셨다(창 2장). 일은 영성 생활의 기본적인 환경이다. 아이들의 놀이란 대개 어른들의 일을 연습하는 놀이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어른들의 일을 배워 간다. 우리가 하는 놀이는 일종의 도제 과정인 셈이다. 영성 생활은,우리에게 일거리가 주어지고 우리가 그 일에 착수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 서서,이제 일을 시작하실 것이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선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의영이 내게 내리셨다.…내게 기름을부으서서…”(눅4:18).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거리를 받는 다는 의미다. 즉 고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이런 말이다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을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너는 그 일을 할수 있다.” 기름부음은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과 연결시켜 준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을 이어 주는 성 례전적(sacramental) 연결이다. 하나님은 일하는 분이시고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신다. 그분은 존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또한 일하시는 분이다 더욱이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다.

다윗이 기름부음올 받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일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는 사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의 심복이 되었다(삼상 16:21). 다윗이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울이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울은 기름부음올 받은 사람이긴 했지만 더 이상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다. 즉 기름부음에 맞추어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다 이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같은 일을 두고 두 명이 서로 비교되고 있는 셈이다.

성령이…기름을 부으시고…. 일은 그 기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있으며,따라서 인간이 너무도 쉽사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인간에게 위험한 유혹의 장도 된다 우리는 일을 잘 하거나 좋은 일음 할 때 정말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자신을 신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기 쉽다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된다 적어도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사울은 좋은 일을 하는 와중에 죄를 지었다. 사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 그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신분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일은 성(14)보다 훨씬 많이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린다 다윗 이야기의 후반부에 가면 다윗이 성적인 유혹에 빠져 간음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러^} 성과 관련된 다윗의 죄보다는 일에 관련된 사울의 죄가 더 파괴적이었다.

정육점의 제시장

나는 일과 예배가 사실상 구별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자란 것을 늘 감사히 여긴다. 내게는 일과 예배가 한 세계의 다른 두 잉상이었다. 내게 일의 세계는 곧 거룩한 장소였다

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셨다 우리는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우리집은 아버지 가게에서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사실 마을 전체가 걸어서 갈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하시던 일터를 떠나서는 나의 과거를 회상할 수 없다. 나는 늘 아버지 곁에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직접 일을 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그 가게의 마스코트였다 손님들은 나를 번쩍 들어올려 이리 저리 혼들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즐거워했다. 어쨌든 나는 그 일하는장소에 있었고그 곳의 일부였다

우리가 예배드리던 장소는 우리가 일하는 장소와 그다지 다른 것이 없었다. 가게에서 늘 보던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마찬가지로 넉넉한 마음으로 우애를 나웠다 우리 교회는 작은 독립 교회였는데,대개 노동자들과 사회의 주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몬타나 주가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다 이 작은 마을로 쏠려 내려온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제사장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하얀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암소와 돼지를 잡아 내장을 뽑아 내고 고기를 자르셨다. 아버지는 늘 웃는 얼굴이셨고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마다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셨다. 아버지 밑에서 고기 자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 보통 두세 명 정도 있었는데, 어린 시절 나는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렀던 우리 교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진짜 우리 가족인 줄 알았다.

내가 네 살이 되자,어머니는 아버지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작업용 앞치마를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해마다 커지는 내 몸집에 맞추어 새로운 앞치마를 만들어 주셨다. 나는 어머니 한나가 실로의 성소에서 엘리 제사장과 함께 일하며 자라는 아들 사무엘을 위해 해마다 만들어 주었던 옷이 꼭 이런 디자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 정육점의 제사장이셨고 나는 아버지의 제사장 일을 돕는 사람이었다 우리 정육점은 축복의 장소였다.

우리는 그 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해마다 힘이 더 세지고 성숙해감에 따라 나는 그에 맞는 새로운 역할을 배우며 적절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일의 존엄함과 일을 통해 얻는 만족을 배워 갔다.

우리가 다녔던 교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회였다. 몇 년 동안 우리 교회에 계셨던 한 목사님은 성막,성전,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도통하신 분이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예배 세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짐숭이 도살되고 바쳐지는 광경과 소리,갓 홀린 피 냄새, 파리들이 날아다니는 소리 등을 경험하며 자랐다 실로의 제단에 황소가 바쳐지는 모습은 중심가에 위치한 우리 가게 도마 위에 뿔 짧은 암소가 올려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게는 염소를 잡지 않았고 또 비둘기 대신 그와 가장 가까운 종류인 닭을 잡았을 뿐이지만,우리 가게에서 매일같이 드려졌던 예배는 유대인들의 예배처럼 신체의 오감이 총동원되고 자극되는 예배였다. 예배는 결코 말쑥하게 차려입고 점잔빼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가게에 어울리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우리 교회 목사님이었다 목사님은 단골 손님은 아니었지만,마을에 순회 전도자나 선교사가 오면 꼭 우리 가게를 방문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한쪽 구석으로 불러 내서 어깨에 팔을 얹고는 기도할 때 늘 내는 ‘영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던 형제,주님이 내 마음에 말씀하신것인데,주님은 요즘 제대로 먹지 못한 그 가난한 종을 형제 가게의 좋은 스테이크 한 점으로 위로해 주기를 원하고 계신다네.” 그러면 마음씨 좋은 아버지는 목사님에게 스테이크 두 점을 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결코 불평하시지 않았지만,점원 아저씨들은 서로 윙크를 하며 뭔가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목사님이 이 신성한 일터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에 난 어 리둥절해졌다.

그 후 25년이 지나고 이제 목사가 된 나는,예배 장소에 들어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다. 국들은 바깥 세상에서 사용하던 어휘의 최소한 50퍼센트는 남겨 두고 예배당에 들어온다 그들은 전혀 다른 어휘를 사용한다. 그들은 조금 긴장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일할 때 쓰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깨달았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교회에서 쓰는 말'로만 이야기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듣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스테인드 글래스와 오르간 반주 분위기만 접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베들레햄의 말구유,갈릴리의 고기잡이 배,베드로의 욕설,마리아의 눈물을 실감할 수 있겠는가? 골고다의 십자가는 말할 것도 없다. 체내 아드레날린 수치를 마구 증가 시켜 놓은 화요일의 사업 거래,배우자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된 수요일의 혐오감, 금요일 오후의 지루한 권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들을 재료로 삼아 구원 사역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차적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 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우리의 영성, 즉 성령님이 우리 안에 형성해 가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성장시키고 실천할 일차적 장소는 예배당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목사로서,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성령을 받는 영성 생활의 일차적 환경은 바로 일의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 보여 주는一주장하는! 一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늘 절감한다.

왕업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일의 세계로 들어갔다.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그는 목자로 일했다. 이는 복음을 표현하는 데 배경과 은유로서 많이 사용되는 직업이다 그러나 이제 다윗의 일은 하나님이 맡기시고 하나님이 정해 주셨음이 분명히 보이는 일이 되었다. 이제 다윗이 하는 일은 왕업이었다.

다윗의 선택과 기름부음 사건 이후에 바로 이어지는 첫 번째 이야기는,바로 그가 일터에서 일하는 이야기다. 현세를 사는 다윗 의 영은 이 첫 번째 직업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모든 진정한 일을 나타내는 말로 왕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일 자체가 가진 본연의 존엄성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우리의 일이란 본디 하나님의 일과 같은 종류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모든 참된 일,모든 진정한 일은 왕업에 포함된다. 또 나는 진짜 일과 가짜 일을 구분하기 위해 이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을 파괴하고 기만하는 ‘일’은 가짜 일이다. 어떤목적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고 해서 그 행동이 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일이란, 일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표현하시는 주권자 하나남에게서 빈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을 나타내는 활동이다. 주권자는 혼돈에서 질서를 이루어 내며, 사물과 사람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부정과 불행과 비참함에서 희생자들을 구해 내며, 정죄받고 저주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며,병든 자들을 치유하며,그 임재를 통해 대지와 사람들에게 존엄성과 영예를 부여하는 일 등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일하는 주권이며 일을 통해 표현되는 주권이다 본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요 거기에 참여하는 활동이어야 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인간이 얼마나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사색하면서 주목하도록 선별해 낸 것은,다름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주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모든 것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시 8:5~6).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관 관계를 우리의 일터에서 인식한다. 왕업은 본질적인 일로서 주권을 나타낸다.

찰스 윌리 엄스의 소설 <황홀경의 그림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들은 폭도들로부터 한 아프리카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프리카인은 왕이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일의 세계,왕업 곧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던 것을 생생한 실제로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왕의 힘이 미친 것이다. ‘몇 분 동안 검은 피부의 낯선 왕이 방에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들은 줄루 족장의 강한 힘과 확신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한 사람,로자몬드만은 ‘갑자기 위엄과 권위를 지닌 인물一스스로를 대단히 신뢰하며 그녀 가까이에서 활동하는一을 의식하게 되자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왕이 있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는 편안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 아프리카 왕 앞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일에는 존엄성이 깃들여 있다. 일에는 왕업으로서의 위엄이 깃들여있다 거룩한 소명으로서의 일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거룩한 직분이다

왕을 섬기는 왕

다윗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 가운데서 시작되고 있다. 이야기란 원래 그렇다 배경 이야기 없이 시작되는 인생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는 이미 낙서가 있고 잉크가 묻어 있고 커피 쏟은 흔적이 남아 있다. 사울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야말로 엉망 진창이었다. 그는 받은 사명을 망쳐 버렸다. 다윗은 사울이 망쳐 놓은 그 일을 바로잡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그 후 20여년 동안 왕으로서 한정받지 못했다 그 20년 동안 그는 왕 같아 보이지 않는 왕이었던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나쁜 왕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 왕의 궁전에 들어가 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종이 되는 것과 왕이 되는 것은 반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종으로서의 섬김이 단순히 왕으로서의 통치를 위한 도제 과정이 아니었다. 즉 이는 어떤 회사의 총수의 아들(따라서 차기 총수)로 하여금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우게 하기 위해 회사의 가장 밑바닥 일부터 해 보도록 하는 경우와는 달랐다 다윗에게,종으로서 섬기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왕으로 통치하는 일이었다. 그는 종인 동시에 왕이었다. 사울의 궁정에서 다윗은 왕을 섬기는 왕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왕으로 경배하는 예수님도 인생의 대부분을 목수 일을 하며 보내셨다.

이처럼 모든 진정한 일에는 섬김과 통치라는 두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통치는 우리가 하는 일의 내용이며,섬김은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방식이다. 모든 선한 일은 참된 주권적 통치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장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섬김이다.

좋은 일을 맡았다고 해서 좋은 일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맡은 옳은 역할이 우리가 옳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라는 좋은 일을 맡았지만 그 일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의 일이나 지위가 의롭다고 해서 우리가 의로운 것은 아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아 정체성을 부여 받았다. 그들은 둘 다 좋은 일을 맡았다. 그러나 좋은 일을 맡았다는 것이 곧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똑같은 일을 수행하는 데 사울은 실패했고 다윗은 성공황다. 직업은 중요하다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일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열쇠,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는 삶의 열쇠는, 어떤 직업이나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가 그 일을 왕업으로 행하느냐이다.

왜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먼저 직업을 묻는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고자 할 때 늘 던지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직장,직업,하는 일 등은一보통 동시에一두 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선,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 준다 즉 우리의 가치관을 표현해 주고, 우리의 도덕관을 드러내며,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반대로 일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보고 우리에 대해 믿기를 바라는 무언가를,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되는 데 관심도 없는 무언가를 선전하는 간판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직업은 이러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 즉 드러내기/표현하기와 감추기/위장하기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를 알고자 할 때 그의 직업이 진정한 그 자신을 숨기는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그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다윗이 왕으로서 했던 첫 번째 일은 음악 연주를 통해, 혼돈에 빠진 사울의 정신과 감정에 다시 하나님의 질서르 ㄹ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왕업의 기초다. 왕업을 하는 이들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아마 음악일 것이다. 음악一리듬과 화음과 조화를 만들어 내는 일一은 모든 일의 핵심이다. 왕업을 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휘파람을 불며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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