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이 세상에 처음 빛을 본 것은 1866년에 잡지 <러시아 통보>지에 1월부터 12월까지 연재되고부터입니다. 그 후 <죄와 벌>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1867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죄와 벌>은 두 개의 작품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5년 6월 8일 자 편지에 <조국 수기> 잡지의 발행인인 끄라예프스끼에게 <주정뱅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구상 중에 있으며, 8월 경에는 완성해서 보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끄라예프스끼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그는 이 단편소설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기본적인 구상은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가족들의 형상들로 나중에 <죄와 벌>에 삽입됩니다. 그 후 3개월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통보>의 발행인인 까뜨꼬프에게 새로운 소설의 플롯을 소개했는데, 그 플롯이 나중에 <죄와 벌>의 기초가 됩니다. <참회>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라즈노친찌(잡계급) 출신의 휴학 중인 대학생이 극도의 가난과 완성되지 못한 이상한 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이 대학생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자수하여 감옥에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대학생의 고백과 참회 형식, 즉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려고 했지만, <죄와 벌>에서는 이 형식이 주변 세계와 주인공의 심리를 보다 폭넓게 묘사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포기하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선택하여 작품을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참회>에서 에피소드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두냐와 루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이야기를 확대하는 한편, 예심판사 뽀르피리를 도입하고, <주정뱅이>의 플롯인 마르멜라도프 가족의 이야기를 보태어 <죄와 벌>을 탄생시킵니다.
<죄와 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에 러시아의 수도 빼쩨르부르그를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극도로 세밀하고도 철저한 도시에 대한 묘사는 지금도 빼쩨르부르그를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의 집 등, 작품 속에 묘사된 장소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렇게 세밀하고도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빼쩨르부르그의 뒷골목에서 직접 살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빼쩨르부르그는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귀부인들이 한가로이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귀족적인 공간입니다. 실제로 빼쩨르부르그는 1861년에 농노해방이 이루어짐에 따라 수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직업을 얻고자 도시로 몰려든 결과, 뽀뜨로 대제가 만들어 놓은 깔끔하게 정리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됩니다. 급작스러운 인구의 팽창은 실업 문제와 더불어 도시의 주거 조건, 즉 수도, 부건 위생, 주택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또한 수도의 뒷골목을 범죄와 매춘, 알코올 중독과 고리대금업의 온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사회적인 배경을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리르게 되는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바로 그런 뒷골목에 위치한 <관>처럼 비좁은 다락방에서 악취가 나는 건물의 계단, 싸구려 선술집과 창녀들, 마르멜라도프와 같은 주정뱅이들과 거리의 악사, 가난한 수공업자들과 상인들,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같은 비정한 고리대금업자들에 부대낍니다. 그리고 이 뒷골목의 세계에서 라스꼴리나꼬프의 범죄에 대한 사상은 싹트게 됩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빼쩨르부르그의 모습을 인간의 정신세계와 연관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후텁지근한 무더위와 답답함을 강조합니다. 사건은 어느 7월의 무던 운 날에 일어나는데, 이 후덥지근한 공기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라스꼴리니꼬프의 정신을 자극하고, 짜증과 분노를 배가 시키며, 그로 하여금 범죄를 실행하도록 부추깁니다. 이 후텁지근한 무더위는 도시의 날씨에 대한 단순한 지적을 뛰어넘어, 범죄 자체의 분위기를 소설에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빼쩨로부르그라는 도시 전체의 숨 막힐 듯한 분위기는 곧 라스꼴라니꼬프가 사는 다락방 안의 답답함과 상통하는데, 좁은 섯리과도 같은 그의 방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머니의 표현대로 '통풍창이 없는 방처럼' 답답한 도시 전체의 모습을 축소시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소설의 공간적인 배경은 주인공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사건의 사회적인 배경의 역살을 할 뿐 아니라, 모출스끼의 말대로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노란색 작은 방'은 악마적이고 시기심에 젖은 고독한 삶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자연과 물질적인 세계는 철저히 의인화되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심리적인 배경이 됩니다.
이런 시공간적인 배경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에 대한 사상은 무르익고, 그 사상에 따라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죄와 벌>은 범죄에 대한 소설이기는 하지만, 형사 사건을 다루는 탐정 소설과는 거리가 먼 철학적이며 심리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설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가 평범한 범죄가가 아니며, 그의 범죄의 성격도 평범하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은 지성인이면서, 동시에 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 그리고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의식이 강한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뻗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지만, 혼자 힘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보호하고 부양할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가난과 가족의 비참한 생활,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스스로도 만일 자기가 그런 이유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행복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돈을 얻기 위해서도, 그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에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속에 내재하는 불의를 보고, 그 원인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세상 과 삶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그 이론이란 세상 사람들을 <범인(犯人)>과 <비범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비범인>은 역사상 위대한 공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세계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해도 되는 특권을 지닌 자들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로서 나폴레옹과 마호메트, 라쿠르고스를 들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들이 인류의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회에서 인정되고 있는 도덕 기준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폭력과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더 나아가서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범인>은 현존하는 질서에 복종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로서 이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률을 초월할 능력이 없고, 이들이 하는 일은 세계를 보존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뿐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두 부류의 인종으로 분류되고, <비범인>들은 세계를 어떤 목적을 향해 이끌어 가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든 감행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믿었습니다. 즉,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가 이 두부류 인간의 상호 공존 위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자연법칙에 의해서 양자의 수가 조절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사실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런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독창적으로 생각해 낸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사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1865년 3월에 발표한 <카이사르의 역사>라는 저술에서 그 시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같은 해 4월에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는데, 나폴레옹 3세는 이 책에서 <비범한 사람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역사 속에서 <때때로 나타나 환한 횃불처럼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미래를 밝히는 비범한 존재들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뒤를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주장을 폈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럽과 러시아의 수많은 평론가들은 황제의 의견을 반박하는 글들을 기고하는데, 이들은 비범한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 강조하며, 황제가 그런 사상을 제창함으로써 모든 도덕적인 제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황제가 도덕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의거해> 인정한다고 보는 평론가들의 해석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소설 속의 다른 주인공들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을 통해 당대에 주장된 사상적인 경향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 논의에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비단 이런 사상에만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 경멸감은 다른 인물들이 보여주는 악과 폭력에 대한 굴종과 순응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마르멜라도프, 소냐, 두냐가 고통과 억압, 불의와 부자유, 악에 대해 굴종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은 나약하고 비열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 대한 분노에 근거해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사실 소석 속의 범죄자는 라스꼴리니꼬프 혼자만이 아닙니다.
러시아어로 '범죄'라는 단어는 "어떤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계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률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위에 언급된 인물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범죄의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소냐는 가족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데,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를 경계선을 넘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즉, 소냐는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두냐는 오빠의 앞날을 위해, 루쥔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죄를 범하고 있으며, 마르멜라도프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도덕적인 경계선을 뛰어넘으면서까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굴종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고,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러한 인간의 순응력과 인간 자체를 경멸합니다. 그는 그런 경멸감은 가지고 두냐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독기를 내뿜으며 이를 거절합니다. 그는 만일 인간이 본성상 그렇게 뒤틀려 있고 타락한 존재라면, 그런 인간이 만든 모든 도덕적인 체제와 기준은 의미 없는 '선입견'이자 '거짓'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도덕적인 규범은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선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만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타인들(마르멜라도프, 두냐, 소냐와 같은)처럼 사회의 불의와 폭력을 참고 지켜보며 거기에 복종할 수많은 없었습니다. 그는 고통과 피로 가득한 부조리한 사회는 단번에 타파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비범인>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인간이 추구하는 두 가지 가치, 자유와 군력 중에서 권력을 선택하여 개미 떼 같은 무리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개인의 갱생과 개조가 불가능하다면, 힘 있는 자가 나타나 지배자가 되어 모든 것을 앞장서서 단번에 개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바로 이런 사상에 근거해서 자신이 <비범인>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기 위하여, 즉 자신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자신이 모든 도덕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범죄가 지닌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세계 질서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그러한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겁니다.
사회에 내재하는 부조리와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논지는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인물 레베쟈뜨니꼬프에 의해서도 설파됩니다. 레베쟈뜨니꼬프는 인간의 모든 범죄는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만일 사회적인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인간의 범죄는 사라질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1860년대에 러시아에 등장한 새로운 인텔리겐찌야 세대의 대표자 격인 체르니셰프스끼의 이론을 비속하게 패러디해 놓은 인물입니다. 그는 당대의 사상적인 경향을 그대로 모방하여 회화화한 사람으로 평가절하되어 소개됩니다.
레베자뜨니꼬프는 체르니쎄프스끼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에서 제창하고 있는 <공산 공동체>를 희화화하면서 이상화시키고, 여성의 권리 등 당대에 유행했던 사상들을 답습하여 그대로 루쥔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인물을 회화화함으로써 체르니쎄프스끼의 사상에서 보이는 계몽적인 합리주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맹신, 인간의 이성이 개인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일들을 모두 지배할 수 있다는 사상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입장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레베쟈뜨니고프는 인물 묘사의 규모로 바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사상적인 노선의 유사점은 간과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 노선은 다른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며, 작품의 사상적인 쟁점으로 떠오릅니다. 무엇보다도 명료하게 위의 사상들을 비판하는 인물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절친한 친구인 라주미힌입니다. 라주미힌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여 주듯이(이 이름의 어근인 '라줌'은 '이성'이라는 뜻입니다.) 건전하고 상식적인 판단과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지닌 이 인물은 죽은 이론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긍정적인 등장인물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친구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을 이성적인 판단하에 '양심에 비추어 유혈을 인정하는 이론'이며, '그것은 합법적으로 피를 흘려도 좋다고 허가된 것보다 더 무서운 이론'이라고 규정합니다. 사회가 완전해지면 모든 범죄가 소멸한다는 사상에 대해 그는 인간의 본성을 외면한 죽은 이론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는 수학적인 계산으로 사회와 전 인류를 조직할 수 없다고 믿으며, 인류 사회의 완성은 오래된 역사의 살아 있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며, 인간은 생명이 없는, 개조의 대상으로서 의 기계가 아닌 모순과 의심, 반항 등 예기치 못한 다채로운 삶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냐와 소냐 또한 라스꼴리니꼬프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저질렀고, 그것이 이론이 입각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론적으로 아무리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양심'은 어떻게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덕률을 상기시키고 있는 겁니다.
논리와 이성에 의해 규제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모순성은 알코올 중독자 마르멜라도프의 노선을 통해서도 확증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마르멜라도프는 어럽게 얻은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와 어린아이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성적이면서도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행동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말미암아 까쩨리나가 보일 추악한 행동과 자신이 당할 모욕, 사람들의 비웃음, 가족과 자신의 파멸을 빤히 알면서도 끝까지 술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으로 비참하게 숨을 거둡니다. 마르멜라도프와 그 가족의 이야기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배경인 비참한 빼쩨르부르그 뒷골목과 부조리한 삶의 비극을 보여 주는 예일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 자체의 부조리함을 보여 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르멜라도프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비범인에 의한 허무주의적인 사회 파괴 사상과 그에 따른 사회 개조 사상이 지니는 허구성을 증명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 주는 예는 그의 분신인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삶입니다. 스브딜가일로프는 사기도박꾼에 호색한으로 자신의 질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라스꼴리니꼬프의 누이동생인 두냐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고, 상처한 뒤 두냐를 쫓아 빼쩨르부르그로 온 부유한 지주입니다. 그는 자기 부인 마르파 빼뜨로브나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며, 하인인 필까를 학대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고, 14세의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정욕의 화신입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며, 부인인 마르파 빼뜨로브나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그의 외도를 인정해 줍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범죄 행위에는 특별한 동기가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내가 원하므로 한다'는 노리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마치 '모든 것이 허용된'듯합니다. 어떠한 도덕률도, 종교적인 감정도 그의 범행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의 범행은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관능의 영역에 속하는 허무주의자의 유형에 속하며, 그의 범행의 동기는 정욕과 쾌락의 만족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입니다. 이러한 그의 범죄는 개인의 치부가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기초가 되므로 우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루쥔식 놀리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익의 충족이 사회적인 이익의 충족이 된다는 역설적인 논리는 자기만족 지상주의, 즉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러한 논리로는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만행도 이해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욕망과 이익의 극단적인 추구가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 된다면, 이런 그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라스꼴리니꼬프라는 비범인에게 적용되듯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삶'이 도래하게 됩니다. 즉 , 이들 모두에게도 인간 고유의 도덕률은 적용되지 않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의 저자는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 사회적인 이익과 개혁을 우선시하는 (라스꼴리니꼬프) 양태 모두를 범죄라고 고발합니다. 즉 라스꼴리니꼬프와 루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삶과 논리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겁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렇게 논리적인 판단하에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의 양심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작품의 전편에 걸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과 그 이후에 그가 겪는 알 수 없는 내적인 불안과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소설은 2주 동안의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대기가 아니라, 라스꼴리니꼬프가 내면적으로 겪게 되는 순간순간의 감각과 모순되는 감정들의 교차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의 시간은 현실적인 시간의 흐름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소설 속의 시간은 심리적으로 체험되는 시간이고, 시간의 길이는 인물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 심리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러 가기 전날 노파의 집에서 느끼는 상호 모순되는 감정과 행동, 즉 살해를 준비하기 위해 꼼꼼히 방을 살피면서도 동시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파와 물건을 거래하는 장면, 어린 시설의 꿈, 기만을 당해 몸을 망친 소녀에게 느끼는 모순되는 감정, 즉 동정과 혐오의 교차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심리적인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인데, 도스토예스스키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누구보다도 먼저 깊이 파헤친 최초의 작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주로 꿈을 통해서 독자 앞에 제시됩니다. 이 꿈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과 심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동시에 그의 사상이 지니는 본질적인 측면을 밝혀 주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그 예로 그의 첫 번째 꿈을 살펴보면,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의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아버지와 함께 마을 밖에 있는 성당을 방문하여 돌아가신 할머니와 동생의 무덤을 찾습니다. 이 평화로운 장면은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영적으로 아름답고 신성한 세계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가 있기에 그는 나중에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와 대립되는 선술집 앞의 세계는 그와는 정반대 되는 악의 세계입니다. 자신의 소유라는 이유로 연약한 말을 처참하게 때려죽이는 모습은 나의 소유물이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의식이 살아 숨 쉬는 예입니다. 이 악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 폭력에 가담하거나, 수동적으로 구경을 하거나, 아니면 잠시 분노를 느끼다가는 곧바로 동화되고 맙니다. 이 얻어맞아 죽어 가는 말의 모습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연약한 말을 너무 심하게 몰아 댄 거야'라는 말에서도 반복됩니다. 세상에서 폭력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까쩨리나 이바노브나, 소냐, 두냐, 리자베따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의 모습을 통해 투영되고 있습니다. 말을 때리는 미꼴까는 루쥔, 고리대금업자,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억압자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린 소년은 작은 암말을 동정하지만, 동시에 라스꼴리니꼬프는 잔인한 미꼴까의 모습에서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는 자신이 계획한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꿈속에서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내적인 투쟁을 목격하게 됩니다. 결국 이상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이자,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인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상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할 만한 인물은 아닌 겁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심리의 부조리한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자들이 쉽게 체포되는 이유를, 일종의 병과 같은 심리적인 갈등을 겪은 나머지 이성을 상실하게 되어 흔적을 남긴다든지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만큼은 범죄의 동기가 이성적이고, 자신이 행할 살인은 엄밀히 따져 보았을 때 범죄가 아니므로, 범행 순간과 그 이후에도 그는 자시니 이성과 의지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실수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불쌍한 암말에 대한 악몽을 꾸고 난 다음에 살인 계획을 포기할 마음을 먹지만, 바로 그 순간 우연히 거리에서 리자베따를 목격하게 되고, 다음 날 노파가 집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사상의 노예가 되어 수동적으로 범죄 행위에 끌려 들어가고 맙니다. 사상의 포로가 되어 수동적으로 범죄 행위에 끌려 들어가고 맙니다. 사상의 포로가 된 그는 신이 창조한 세계 질서의 부조리와 무의미를 비난하며, 그 세계에 도전함으로써 그 즉시 '우연한 사건들'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살인하는 날 라스꼴리니꼬프는 지쳐서 잠들어 있다가 시계 종소리를 듣고는 누군가 그를 긴 의자에서 튕겨 내기라도 하듯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시간이 이미 6시가 지났다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가 살해의 도구인 도끼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범행 현장에 도착하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우연의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라스꼴리니꼬프는 사건의 주체자가 아닌 꼭두각시로 둔갑하고야 맙니다. 그의 이런 수동성은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가 막연히 가지게 된 미신적인 성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우연한 사건들 속에서 맹목적인 '운명'을 느끼며, 도덕적인 책임감과 선택의 자유를 상실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성의 짓이 아니라 악마의 짓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의 범죄의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밝혀집니다. 그의 범죄는 신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믿음에 대한 배신이고, 그것은 곧 그의 존재가 신의 세계에서 악마의 세계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맹목적인 운명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이렇게 범죄의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과정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 우리는 라스꼴리니꼬프가 겪는 심리적인 '징벌'의 과정을 목격하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다가오는 '징벌'은 육체적인 징역살이도 아니고, 후회의 심정도 아닙니다. 사실 그는 에필로그에 도달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끝까지 죄의 중압감을 견뎌 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만을 경멸합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해지는 '징벌'이란 무엇이며, 또 그는 왜 자수를 하는 것일까요?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가 미리 이성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가운데 저질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에서도 실수를 했지만, 범죄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못된 판단을 내립니다. 그는 범죄가 외적인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살인은 저지른 다음 날부터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과의 심리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 사실의 긍정과 부정에 따라 기쁨과 절망, 공포감을 번갈아 느끼게 됩니다. 의구심은 점점 자라나서, 그로 하여금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듯한 고독감을 느끼게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없고, 그들이 사실을 알았을 때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은 거짓과 은폐로 가득 차게 되고,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단절을 겪게 됩니다. 이런 단절은 한 개인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죽음과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며 자살을 시도해 보려고 하지만, 끝내 결잔을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보기에 무익하고 증오스러우며 한낱 혐오스러운 '이'에 불과한 노파를 살해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자신의 상황에 대해 그는, 자신을 유혹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한 악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나자 자신에게 '너는 그런 행동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조롱하는 것 같다고 소냐에게 고백합니다. 이런 그의 심리는 살해당한 노파가 되살아나 그를 비웃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는 꿈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혐의점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나방이 불에 뛰어들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뽀르피리를 찾아가데 됩니다. 뽀르피리에 대한 공포는 법적인 징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내면세계에서 비롯되는 공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연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성을 지배하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겁니다. 그의 이성과 '본성'은 서로 분열되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혼동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의 이성은 그의 정당성을 옹호하지만, 그의 본성은 그의 죄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의 분열은 그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러시아어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어근은 '라스꼴'인데, 역사적으로 볼 때, '라스꼴'은 17세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에 반발하여 옛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자 기존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구교도 혹은 분리파 교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언어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분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분열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분열'과 정신적인 '죽음',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소외와 단절이 그의 범죄에 대한 심리적인 징벌의 본질인 겁니다.
예심 판사인 뽀르피리는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심리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그 본질을 파헤쳐 주는 인물이자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중요한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뽀르피리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에 심리적인 분석을 통해 접근하여 궁극적으로 그의 정체를 파헤쳐 갑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뽀르피리 앞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지만, 이미 내적으로 분열되어 자기 자신 앞에서도 자연스러울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뽀르피리는 그의 이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를 자극하고 초조하게 만들어 그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도록 유도합니다. 동시에 뽀르피리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생명 존중 사상'과 '고난을 통한 정화'라는 도스포예프스키의 사상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이론의 노예가 되어 파멸해 가고 있을 때, 뽀르피리는 생명과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권유합니다. 그는 고리대금업자 노파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니꼴라이가 라스꼴리니꼬프 대신 죗값을 치르고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방탕한 삶에 대한 죗값을 치러 정화되겠다는 생각을 이해하고, 라스꼴리니꼬프에게도 니꼴라이처럼 행동할 것을 권유합니다. 뽀르피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전달하는 뛰어난 심리학자로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를 갱생으로 인도하는 구원자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뽀르피리는 라스꼴리니꼬프를 구원으로 이끌기에는 지나치게 분석적인 사람으로, 법률적이고 심리적인 관점에서만 그에게 관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를 구원하는 임무는 다른 주인공인 소냐에게 맡겨집니다. 뽀리피리와는 달리 소냐는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고 그를 비난하지도 않으며, 그의 불행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이런 그녀를 통해서 라스꼴리니꼬프는 구원과 갱생에 도달하게 됩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관점으로 보았을 대, 소냐는 폭력에 굴종하고 순응하는 평범하고 경멸스러운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작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자기희생'이라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냐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리체와 루치아에 비견될 만한 인물입니다. 이름을 통해서도 그녀가 지닌 작중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소냐의 완전한 이름인 '소피야'는 라틴어로 "지혜"를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비요프, 불가꼬프, 블로끄 등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에 의해 '성삼위일체'의 결합과 '성스러운 피조 세계에 대한 우주적인 사랑'을 내포한 존재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소냐는 창조자와 창조물의 성스러운 결합을 믿으며,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로서의 창조자를 삶의 안식처로 삼아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감내하는 인물입니다. 작품 속에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 의해 '유로지비'로 불리는데, 이 유로지비들은 중세 러시아의 정교적인 전통에서 '세상 속에서는 바보스러우나, 영적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바보스럽다 못해 때로는 미친듯한 행동으로 세속적인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오히려 숨겨진 삶의 진리를 밝혀주는 사람들입니다. 소냐는 살해당한 고리대금업자 노파의 동생인 리자베따와 함께 세상 속에서 부유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순종과 믿음 속에서 창조자의 섭리를 발견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타락한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사람인 겁니다.
이 '거룩한 창녀'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성서의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 줍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에게 이 부분을 읽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의 궁극적 부활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소냐는 '나사로의 부활'을 읽어 줌으로써 신을 부정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영적으로 부활시키고자 갈망합니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의 고백을 들었을 때, 소냐는 그에게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네거리에 가서 대지에 입 맞추고 사방에 절하며 자신이 살인자임을 밝히라고 설득합니다. '대지에 입 맞추는 것'은 중요한 의식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기독교 도래 이전의 전 인류와 러시아인의 의식 속에서 '대지'는 풍요의 근원으로서 인류의 보편적인 '어머니'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지에 입을 맞추는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 관계를 끊었던 모든 이들, 어머니와 동생, 친구와 사회 전체의 유대 관계, 즉 삶의 근원자인 '어머니 대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는 소냐로부터 삼나무 십자가를 선물로 받고 자수하러 갑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살해 당시 노파의 십자가를 던져 버린 행동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행동을 통해 고통과 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합니다. 이렇게 대지에 입 맞추고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부활은 서서히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죄를 이서적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비범인으로서의 첫걸음을 자기가 감당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모욕감과 좌절감을 겪습니다. 그가 자수를 하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지 모른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겁니다. 혹은 자신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한 비열한 인간이라는 자의식의 괴로움 속에서 자신의 비열함을 더욱 확증하기 위해 일부러 자수를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중의 서술자는 독자들에게 그가 자수를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주지 않습니다. 서술자는 자수의 과정을 서술하며, 주인공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지와 이성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순간순간의 알 수 없는 감동과 감각에 대해서만 서술할 뿐입니다. 알 수 없는 감동이 그로 하여금 기도하자는 소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 마찬가지로 광장에서도 그를 발작처럼 사로잡아 무릎을 꿇게 하며, 환희와 행복에 젖어 더럽혀진 대지에 입 맞추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 속에서는 신과 악마의 다툼이 계속됩니다. 그는 경찰서에서 자백을 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와 버립니다. 그는 자신이 결행하지 못한 자살을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감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겁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가 뛰어넘지 못한 또 하나의 경계를 뛰어넘은 겁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도전장이며, 그의 무기력과 비열함을 보여 주는 본보기로 다가옵니다. 그는 또다시 경제를 뛰어넘어 보려고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경찰서 마당에서 소냐의 간절한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그의 자수 과정도 이렇게 의지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충동과 이끌림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영홍을 놓고 벌이는 신과 악마, 빛과 어둠의 투쟁을 볼 수 있습니다.
에필 로스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갱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에필로그의 시간이 부활절 기간인 봄이라는 것도 그의 부활을 암시해 줍니다. 시베리아에서 1년을 보낸 라스꼴리니꼬프는 여전히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만한 삶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소냐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봉사를 바칩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과정은 '꿈'이라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는 독특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사람들이 이론과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라고 확신하고 서로를 죽이면서 파멸해 가는 꿈을 꿉니다. 이 꿈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지녔던 이성주의의 허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사상의 허점을 발견한 그는 결국 소냐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부활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작중의 서술자는 그의 변화를 단 한마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는 말로 정리합니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삶 자체가 승리를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베개 밑에 놓인 복음서가 그의 갱생을 도울 것이라는 말을 통해, 궁극적으로 신과의 화해를 통해 갱생이 완성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소설 <죄와 벌>은 한 가난한 대학생의 범죄를 통해 죄와 벌의 심리적인 과정을 밝혀 줄 뿐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문제, 즉 죄와 인간 본성의 문제, 선과 악, 신과 인간, 사회적 환경과 인간 범죄의 상관성, 혁명적인 사상의 실제적인 측면의 문제, 등 폭넓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도덕과 윤리와 측면의 문제 등 폭넓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도덕과 윤리와 연관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룬 심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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