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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톨스토이의 생애 _민중 속에서 실천하라!

by 비앤피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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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고질적인 병폐인 농조제는 사회 계층을 귀족과 농노로 양분시키면서 사회 발전을 오랫동안 가로막았습니다. 청년 귀족 장교들은 농노제를 기반으로 하는 짜르 정권에 맞서 제까브리스트 반란(1825)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반란은 즉각 무력으로 진압되었습니다. 농노제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점점 고조되자 아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사법개혁을 단행했지만 황제의 칙령으로 시행된 <위로부터의> 개혁은 농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지 않고 신분적 자유만을 부여하는 외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다시 국가와 귀족과 지주들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당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쪽짜리 개혁은 사회를 혼란과 갈등으로 모아갔고 민중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내부에는 점점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고, 인민주의자들은 견고한 전제 정권에 테러리즘으로 대항했습니다.

1881년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의 테러에 암살당하는 파국이 벌어졌습니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무자비한 반동 정책으로 혁명 세력은 물론 심지어 자유주의자들까지 탄압했습니다. 그로부터 황제, 지주 귀족, 정교회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 지식인, 혁명가, 농민으로 대표되는 자유 혁명 세력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충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바로 이 시기, 즉 1880년대와 1890년대가 바로 장편소설 <부활>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마지막 장편소설 <부활>에서 당대의 첨예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예리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창작한 톨스토이의 투철한 작가 정신은 그의 삶 속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국가 권력과 종교에 대항한 문단의 구조자

례프 니콜예비치 톨 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최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에 서구식 작위 제도가 도입된 뾰뜨르 대제 시대에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고, 그로써 톨스토이 집안은 대대포 작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의 할아버지느 ㄴ까잔 현 지사를 지냈고,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 참전한 퇴역 군인이었으며 그의 외할아버지 불꼰스끼 C. F. Volkonskii 공작은 예까쩨리나 2세 시대에 총사령관을 지낸 유력한 귀족이었습니다. 부유한 외가 덕택에 톨스토이는 자신이 태어나고 또 많은 작품을 창작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영지 야스나야 뽈랴나를 유산으로 물려받습니다. 이 상징적인 장소는 1921년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국유화된 이래 오늘날까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의 유년시절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홉 살 때 다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톨스토이 남매들(4남1녀)의 후견인이 된 할머니도 1년 만에 세상을 떴고 큰고모마저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톨스토이 남매들은 먼 친척 뻘 되는 예골스까야 아주머니 손에 넘겨져 양육되었습니다. 예골스까야 아주머니는 까잔으로 이사한 후 톨스토이 남매들을 친자식처럼 정성스럽게 키웠습니다. 어머니의 기억을 갖지 못한 톨스토이에게 예골스까야 아주머니는 어머니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사망하기 며칠 전 메모에 남긴 '해야 할 일을 하면, 이루어지리라'라는 좌우명은 그녀가 남긴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16세가 되던 해인 1844년 톨스토이는 까잔 대학 동양학부 터키-아랍 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문에 관심이 없었던 톨스토이는 여느 귀족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사교계의 소용돌이에 빠져듭니다. 당시 까잔은 명문가의 사교 중심지가 될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고, 할아버지가 까잔 현의 지사를 지낸 덕택에 젊은 톨스토이에게 상류 사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사교계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젖어 있던 톨스토이는 수업에 자주 결석하며 결국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는 법학부로 학과를 옮겼지만 역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습니다. 몽테스퀴외의 <법 정신>과 예까쩨리나 2세의 <훈령>에 심취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던 톨스토이에게 대학 생활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대학 생활 속에서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이 작업은 평생 자신의 주요 일과가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에게 일기는 생활의 기록이자 정신적 자아의 정화 과정이요, 일종의 문학 훈련이었고, 또 문학적 소재의 보고였습니다.

1847년 법적 상속 연령을 넘기면서 톨스토이는 영지 야스나야 뽈랴나를 자신의 몫으로 상속받습니다. 19세의 대학생이던 그는 별안간 1,300여 헥타르의 토지와 330여 명의 농노(농노의 가족을 합하면 실제로는 약 700여 명)를 소유하는 지주가 되었습니다. 의욕에 넘치는 젊은 지주 톨스토이의 모습은 그의 중편소설 <지주의 아침>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학을 중도에 포기한 톨스토이는 <자기 완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야스나야 뽈랴나로 귀향하여 독학으로 농업, 의학, 법학, 수학, 어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 학문을 접한 모범적인 지주가 되기 위해 농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주에 대한 불신과 적의로 인해 그의 선의와 실험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뽈랴니를 떠나서 한동안 모스크바에 살다가 빼쩨르부르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형법과 민법 시험을 치기도 했지만, 수도에서의 화려하고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반년에 걸친 빼째르부르그의 혼란스러운 생활 끝에 그는 야스나야 뽈랴나로 쓸쓸히 돌아왔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톨스토이는 1849년 가을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개설하기도 하고, 뚤라 현청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혈기왕성하고 못ㄴ적인 청춘기는 톨스토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고 그는 다시 모스크바와 야스나야 뽈랴나를 오가며 방황을 거듭합니다. 그때 형 니꼴라이가 까프까스로 함께 떠나자고 권유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던 톨스토이는 맹목적으로 니꼴라이를 따라 나섭니다. 까프까스에서 톨스토이는 처음으로 산악 지방과 산악인들을 목격하고는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습니다. 그때 그가 받은 인상은 중편소설 <까자흐 사람들 Kazaki> 속에 묘사됩니다.

까프까스에서 지원병으로 산악 민족 토벌에 참여했던 톨스토이는 이 시기에 중편소설 <유년 시대>를 집필하면서 소설가로서 첫발을 내디딥니다. <유년 시대>는 빼쩨르부르그의 문예진 <동시대인>에 실리면서 문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두나이 부대로 전근한 톨스토이는 터키 군과의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세바스또뽈의 이야기를 꾸준히 전쟁 소설로 발표합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세바스또뽈이 함락되자 그는 군대에서 퇴역합니다. 그 후 수년간 톨스토이는 여름은 야스나야에서, 겨울은 모스크바나 빼쩨르부르그에서 보내다가 1855년 가을, 직업 작가로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 시기에 톨스토이는 <동시대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 네끄라소프, 뚜르게녜프, 곤차로프, 체르나쉐프스끼,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톨스토이는 민주적 작가들보다는 자유주의적 작가들에 더욱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식들의 도덕적 재무장과 개인의 자기완성을 통해 개혁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그는 얼마 후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856년 톨스토이는 스스로의 신념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자신의 농노들을 농노제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시도는 다시 실패하고 맙니다. 농민들은 톨스토이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선의는 단지 자신들을 토지에서 쫓아내려는 지주의 교활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살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 부족과 계몽 방법이 문제라고 생각한 톨스토이는 1856년부터 1862년 사이에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면서 농민 교육학 연구에 전념합니다. 그는 교육 잡지 <야스나야 뽈랴나>를 출판하는 한편 농민 자녀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기도 하고 교육 분야에서 경험을 넓히기 위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사회 활동으로 혼기를 넘긴 톨스토이는 1862년 여름, 소프야 베르스(1844~1919)와 뒤늦게 결혼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톨스토이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로 안정을 찾으며 가장 평온한 상태에서 창작에 몰두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렇게 6년 이상의 안정된 작언 끝에 <전쟁과 평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쟁과 평화>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는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사회적 혼란과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창작에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1870년 초에 러시아의 19개 현에서는 민중들이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행정 당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습니다. 1873년 톨스토이는 사마라 현을 직접 순회하면서 처참한 기아 현장을 목격했고,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잡기 <러시아 통보>에 폭로 기사를 썼고 그로 인해 빈민 구제 운동이 범사회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소설 <안나 까레니나>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가 완성될 무렵, 톨스토이가 빈민 구제 활동으로 돌아서서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뚜르게녜프는 임종을 앞두고도 톨스토이에게 직접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당신과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말씀드리기 위해, 또 저의 진정 어린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친구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십시오! 만물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나 바로 당신의 재능이 있습니다. 제 부탁이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저는 얼마나 기쁠까요....... 친구여, 러시아 대지의 위대한 작가여, 저의 부탁을 고려해 주시길"

이렇게 톨스토이의 사회 참여는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관심 사항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1870년대는 톨스토이가 예술 활동을 중단하려는 복잡한 내적 갈등을 겪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전환기를 저치면서 톨스토이는 귀족 계급의 전통적 생활과 점점 단절하고 민중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작품과 기사 속에는 소박한 민중적 생활을 지향하는 '톨스토이주의'의 이념적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던 중 1882년 모스크바 인구 조사에 참여한 톨스토이는 사흘간 히뜨로프 시장과 여인숙에 지내며 도시 빈민들의 현실을 목격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부자들과 지식인들인 우리 계층의 삶은 내게 역겨워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다'라고 토로하며 더욱 평범한 민중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새롭게 눈뜬 작가는 다시 문단으로 돌아와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체르 소나타>, 등의 작품과 더불어 마지막 장편소설인 <부활>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출판은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출판에 황제는 분노했고, 종무원은 교리와 예배 의식을 공격했다며 1901년 톨스토이를 파문합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극작가 알렉세이 수보린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명의 황제가 있다. 니꼴라이 2세와 레프 톨스토이이다. 누가 더 강력한가? 니꼴라이 2세는 톨스토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톨스토이의 권좌를 흔들지 못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니꼴라이의 권좌와 왕조를 뒤흔들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인 1880년대부터 톨스토이는 가난한 민중들을 남겨 둔 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이 호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해서 서유럽, 미국 등지의 저명인사들이 그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영지를 방문하고 언론에서는 연일 <민중의 양심>, <인생의 지혜로운 스승>으로 그를 조명했지만, 톨스토이는 부유한 자신의 삶이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토지와 재산을 버리고 민중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사회는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1909년부터 가족을 버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찾아 구도의 길을 걷고 싶어 했던 그는 1910년 10월 28일 이른 새벽, 80세를 넘긴 노구를 이끌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랄행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아스따뽀보역에서 위대한 생을 끝마쳤습니다. 폐렴이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아무 종교 의식도 치르지 않은 채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야스나야 뽈랴나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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