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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부활」_ 집필의 과정들

by 비앤피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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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즈음(59세 톨스토이는 법률가이자 작가인 코니(1844~1927)로부터 흥미로운 형사 사건을 들었습니다. 열여섯 살 고아 소녀가 자신을 양육한 귀부인의 조카와 정을 통하고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귀부인 집에서 쫓겨나 창녀로 전락 소녀는 절도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녀를 유혹한 남자가 우연히 그 재판의 배심원이 되어 그녀와 재회를 합니다. 그는 그녀의 비참한 모습에 자기 죄를 크게 뉘우치며 결혼으로 속죄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감옥에서 장티푸스로 죽고 맙니다.

톨스토이는 코니에게 이 일화를 소설을 쓰라고 적극 권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코니가 글을 쓸 기미가 없자 1889년에 그의 허락을 받고 그 소재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1899년에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그 십 년 동안 그는 <크로이체르 소나타>, <악마>, <계몽의 열매>, <주인과 하인>, <신ㄴ부 세르기이> 등 문학 작품을 비롯해 사회와 종교와 예술에 관한 에세이들을 집필하여 빈민 구제에 힘쓰느라 <부활>에 온전히 시간을 바치지 못하고, 1899~1890년, 1895~1896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원고에 매달렸습니다. 끝맺지 못하고 밀쳐 둔 원고를 결국 완결하게 된 것은 1898~1899년에 두호보르 교도들을 캐나다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호보르교는 18세기부터 러시아에 존재한 그리스도교 종파입니다. 개인 안에 성령이 있다고 믿으며, 정교회의 교리와 의식을 거부했고, 문자화된 기록을 거부해 신약 성경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종파 지도자가 말로 전하는 가르침만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체계가 느슨해 다양한 파벌이 존재했지만, 대체로 교회와 국가를 부정하고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거부하며 채식주의를 따르는 것이 교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종교에 우호적이던 알렉산드르 1세는 19세기 초에 식민지를 개척할 겸 이들을 크림으로 이주시켜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그 뒤에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그루지야(지금의 조지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징집하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1895년 군 복무를 거부하며 자신들이 소지한 무기를 모아 태워 버렸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것을 중좌로 보고 수많은 교도를 투옥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톨스토이는 구제 여론에 호소하는 등 두호보르 교도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중지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러시아 정부는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의 사상이 국내에 확산되는 것을 막는 한편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전부 캐나다에 이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주비 마련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모금 활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돈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1881년 이후의 저술에 대해 저작료를 받지 않기로 한 원칙을 깨고 집필 중이던 <부활>을 1898~1899년에 필사적으로 마무리해 주간지인 <니바>와 선금 1만 2000루블에 출판 계약을 맺어 그 돈을 전부 이주비로 보탰습니다. 톨스토이는 당시 이름 높은 화가이던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닥터 지바고>로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에게 직접 삽화를 의뢰했고, 이 책에도 실린 그 삽화들로 인해 화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부활>을 일본어로 번역한 후 지누마 다카시는 톨스토이가 선금으로 받은 금액이 현재의 일본 통화로 2억 엔(우리나라 통화로는 약 2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라고 설명합니다. 톨스토이가 두호보르 교도들을 위해 이토록 엄청난 시간과 체력과 금전을 희생한 이유에 대해 혹자는 그 종파의 성향이 톨스토이의 말년 사상과 공통점이 많아 동질감을 느꼈을 거라고도 추측합니다. 하지만 당시 수감 중인 두호보르 교도가 체르트코프(톨스토이의 사회적 활동을 지지하고 조력한 동지)에게 보낸 글을 보면 당시 톨스토이가 어떤 심정으로 이 일에 매달렸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첫날부터 피비린내 나는 매질이 가해졌다. 그들은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굵은 가지로, 가시가 살점에 박힐 때까지 매질을 당했고, 그런 다음에는 춥고 어두운 골방에 던져졌다. 며칠 뒤 그들은 군 복무를 하겠느냐고 다시 질문을 받았다. 만약 거절하면 그와 같은 매질이 다시 가해졌다. 그런 행위가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았고, 아주 적은 양의 빵만으로 연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탈진해 병에 걸렸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들의 병원 이송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들이 육식을 하겠다는 동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목이 정교도식으로 예배를 집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먹과 몽둥이 세례를 받으며 교회로 끌려 들어갔다.

아마도 톨스토이는 살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인신을 이처럼 조직적으로 구금하고 학대하는 국가를 용납할 수 없었고, 그런 희생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양 침묵할 수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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