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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부활」_독특한 특징들

by 비앤피 202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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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는 다른 두 장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눈에 두르러집니다. 첫 번째, <부활>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자료 조사를 위해, 혹은 자신이 흥미롭게 여기는 작가의 작법이나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 소설에 녹여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호메로스, 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스턴, 디킨스, 스탕달, 루소, 쇼펜하우어, 성경 등은 톨스토이의 용광로 속에서 완전히 녹고 뒤섞여 톨스토이가 주조한 새로운 틀에서 응고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에서 그는 다른 작가들 작품의 구성이나 구절을 엮어 넣고 의도적으로 노출시킵니다.

우선 구성이 고골의 <죽은 혼>을 연상시킵니다.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죽은 농노들의 명의를 사들여 은행 담보물을 삼기 위해 지주 귀족들을 찾아다니는 치치코프의 여정에서 깊은 무기력과 무지에 빠진 러시아가 풍자적으로 드러나듯, '사랑'을 얻기 위한 네홀류도프의 종횡무진한 행동을 통해서도 러시아의 실상과 문제가 한 꺼플씩 드러납니다. 치치코프가 부당한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여행하는 탐욕스럽고 교활한 악당이라면 네홀류도프는 속죄와 거듭남을 위해 여행하는 회개한 악인입니다. 즉, <부활>은 거꾸로 뒤집힌 <죽은 혼>인 셈입니다. 톨스토이는 14살에서 20살 사이에 고골의 <외투>, <비이>, <죽은 혼>, 등을 탐독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한편 결말 부분에서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타치야나의 사랑 고백을 차갑게 거부한 오네긴은 몇 년 후 친구인 공작이자 장군의 부인이 된 타치야나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 반해 애정을 구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남편에 대항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다며 그 고백을 뿌리칩니다. <부활>에서는 18살 카츄사의 사랑을 짓밟고 정욕만 채운 네홀류도프가 십 년 뒤 재회한 그녀에게 속죄를 위해 청혼하지만 이타적인 정치범들과의 교제속에 선한 본성을 회복한 카츄샤는 그에 대한 사랑을 숨긴 채 인품이 훌륭한 정치범 시몬손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며 그 구애를 거절합니다.

톨스토이가 사냥하러 갔다가 들른 농노의 집에서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밤새 읽은 책이 <예브게니 오네긴>이었고, <벨킨 이야기>와 <대위의 딸>, 등을 읽다가 불현듯 쓰기 시작한 소설이 <안나 카레니나>라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푸시킨을 '나의 대부'라고 부르며 그의 작법을 열렬히 탐구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니에게도 처음에는 타치야나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부활>에서는 앞서 언급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작품도 느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문학사의 최고작으로 꼽은 <죽음의 집의 기록>은 귀족인 고란치코프의 유형생활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시베리아 죄수들의 군상을 사진첩처럼 모아 놓은 이 작품은 생생한 인물 묘사를 통해 러시아 민중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습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감옥과 죄수들의 생활을 묘사할 때 이 작품을 많이 참조하고,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고란치코프가 형기를 마치고 족쇄에서 해방된 후,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라는 동료 죄수들의 작별 인사를 들으며 출소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고란치코프는 말합니다.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게다가 <부활>의 마지막 장면은 명백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바치는 헌정문입니다. <죄와 벌>에서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에서 징역살이를 하게 되고 소냐가 그를 따라갑니다. 불현듯 소냐에 대한 사랑을 자각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야외 작업장에 살그머니 다가와 곁에 앉은 소냐의 무릎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톨스토이도 <부활>에서 사랑을 통해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삶을 향해 부활하는 남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카츄샤는 소냐같이 창녀로 설정됐고,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살인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떠납니다. 이 소설에서 소냐처럼 죄를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로 동행하는 것은 그녀를 창녀 신세로 전락하게 만든 쬐를 속죄하려는 귀족 남성 네홀류도프입니다.

한편, 부활의 기쁨을 느끼고 감옥으로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베개 밑에서 소냐가 준 성경을 기계적으로 집어 들었다가 그녀의 신념이 곧 자신의 신념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죄와 벌>은 다음과 같은 화자의 말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이자 점차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점차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 여태껏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 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애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 우리의 지금 얘기는 끝났다.

네홀류도프는 영국인 선교사의 통역을 맡아 감옥을 방문하고 돌아와 그가 준 성경을 무심코 집어 듭니다. 네홀류도프는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모든 폭력이 근절되기 위해. 다시 말해 사회가 부활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판과 형벌이 아닌 사랑과 연민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화자의 말로 끝납니다.

이날 밤 이후 네홀류도프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그가 새로운 생활 조건 속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때부터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그에게 이전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띠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이 새로운 시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미래가 보여 줄 것이다.(2권 446쪽)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수십 년 전 제시한 부활과 사랑의 테마에 대해 자신의 변주를 펼친 듯합니다. 그리고 그의 화자는 '부활'이란 방황하는 인간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새로운 미래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임을 알리며 마치 <죄와 벌>의 화자와 더불어 웅장한 이중창을 하는 듯합니다.

<부활>이 품은 작품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 자신의 <안나 카레니나>일 겁니다. 자살로 브론스키에게 복수하려는 안나는 철도에 바짝 붙어 객차의 중간 지점과 자신의 몸이 나란해질 때를 기다려 뛰어들려고 합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안나는 팔을 잡아당기듯이 방해하는 빨간 손가방 때문에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면서 바람대로 달리는 기차의 바퀴와 바퀴사이에 뛰어듭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하고 있는거야? 무엇 때문에?"

<부활>에서 이 설정은 뜻밖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재현됩니다. 

'기차가 지나갈 때 객차 밑으로 몸을 던지자. 그럼 모든 게 끝나겠지.' ..... 그녀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흥분이 지난 직후의 평온한 순간이면 늘 그렇듯 그가, 아긱, 그녀의 배 속에 있는 그의 아이가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떨고 부딪고 경쾌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가늘고 부드럽고 뾰족한 무언가로 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일 분 전만 해도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것이, 그를 향한 모든 분노와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에게 복수하고팠던 열망이,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멀리 사라졌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숄로 머리를 감싼 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1권 283쪽)

임신한 카츄샤는 군대에서 돌아오는 네홀류도프가 아마도 그녀를 피하기 위해 고모 집에 들르지 않고 페테르부르크로 곧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탄 기차의 운행 시간에 맞춰 한밤중에 기차역으로 갑니다. 동료들과 유쾌하게 즐기는 네홀류도프를 기차 창문 너머로 간신히 볼 뿐 그를 만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녀는 절망한 나머지 기차에 몸을 던지려 합니다. 안나를 붙잡았던 빨간 손가방 대신 이번에는 배 속의 아기가 그녀를 붙잡습니다. 그 순간 카츄샤는 복수하려던 마음을 접고 생으로 복귀합니다. 그녀는 안나가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삶을 선택한 그녀 앞에 죽음이나 다름없는 모욕적이고 비참한 생이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생은 또다시 그녀에게 부활의 빛을 비추고, 그녀 안에서 사랑이 눈을 뜹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푸시킨부터 체호프까지 백 년 동안 이어진 풍요롭고 찬란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마지막 생존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을 겁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의 마지막 장편에 될 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작가로서 성숙시킨 작가와 작품들의 표식을 마지막 소설 곳곳에 세우고 경의를 표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톨스토이는 한 가지 중요한 발견을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발견은 비평가들에게 한 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삶을 그리는 가장 흡족하면서도 우리의 시간관념에 딱 들어맞는 방법을 발견했다.  .... 평범한 독자들을 사로잡는 그의 진정한 힘은 우리의 시간관념과 정확히 들어맞는 시간을 작품에 부여하는 그의 재능이다. ..... 선량한 독자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평범한 리얼리티에 대해 흔히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과 연관시키곤 하지만, 이런 리얼리티 역시 톨스토이만이 갖는 시간적 균형 감각에서 온다. 톨스토이의 산문은 우리의 맥박과 같은 속도를 갖는다.

그런데 <부활>의 화자는 이전의 두 장편처럼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차례차례 펼치지 않고 느닷없이 카츄샤의 현재에서 과거로, 네홀류도프의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두 인물의 현재로 급격하게 오가며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무심하게 짤막히 소개하다가 외양과 행동과 감정의 흐름을 실시간처럼 세밀하게 재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술은 속죄하는 인간을 그리는 데 아주 효과적일 겁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문득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과 타락의 계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고 개심과 거듭남을 위해 애쓰는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끝없이 뒤섞지 않고서는 그려 내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화자가 전작의 화자들처럼 사건의 전체상을 차례로 독자들에게 열어 보이거나 여러 인물의 삶과 시각을 공평하게 비추지 않고 고의로 왜곡하거나 감추는 모습은 톨스토이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대단히 낯설어 보일 수 있습니다.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이 의문스러운 화자는 정보를 부분적으로 흘리면서 독자가 등장인물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갖도록 유도하고, 등장인물의 기억을 그 내면에 가둬 둠으로써 사건의 전체상을 숨기기도 합니다. 가령 재판 전에 카츄사와 네홀류도프의 과거를 짧게 요약한 부분은 마치 자극적이고 무신경한 가십 기사처럼 카츄샤를 파렴치하게 그립니다. 주인댁 조카의 유혹에 넘어가 임신한 후 갑자기 지주 마님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집을 뛰쳐나갔다든지, 지주 집의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져 노동하는 남자들의 청혼을 꺼렸다든지, 힘든 일이 싫고 화려한 옷차림과 맛있는 음식에 끌려 유곽에 들어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카츄샤가 대모들 집에서 얼마나 고달프게 하녀 노릇을 했는지, 네홀류도프 때문에 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얼마나 절망적인 심정으로 자살을 기도했는지, 유곽 생활을 얼마나 지긋지긋해하며 탈출을 꿈꾸었는지는 나중에야 카츄샤의 회상을 통해 서서히 드러납니다.

한편 나타샤와 피에르, 또는 나타샤와 안드레이,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와 카레닌, 레빈과 키티, 등 전작들의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주고 다른 가치관이나 오해로 끝없이 다투면서 상대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낱낱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카츄샤와 네홀류도프는 서로의 기억을 상대와 공유하지 않으며 속마음을 제대로 내보이지 않고 겉도는 대화만 나눕니다. 그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사건의 전체상에 닿지 못한 채 저마다 진실 한 조각을 붙들 뿐입니다. 심지어 3부에서는 화자가 카츄샤의 회상이나 내적 독백 조차 차단해서 그 진심을 알 길이 없습니다. 결국 네홀류도프의 청혼을 거절하고 시몬손과 결혼하겠다는 그녀의 속내는 끝내 밝혀지지 않습니다. 네홀류도프는 카츄샤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의 희생을 바라지 않아서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카츄샤는 사랑 없이 속죄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 네홀류도프의 청혼에서 십 년 전 그가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쥐여 준 100루블짜리 지폐를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혹은 네홀류도프를 괴로운 삶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적이고 선한 시몬손의 애정에 자존감과 사랑의 설렘을 회복해서 진심으로 그와의 결합을 꿈꾼 것인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과거에 대한 네홀류도프의 비탄과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서술하는 동안에도 화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에 스스로 감격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카츄샤와 결혼해 시베리아로 가겠다고 말하면서도 귀족들의 청결하고 안락한 생활, 품위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 풍요롭고 단란한 가정을 계속 흘깃거리며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눈길을 주는 불안한 모습을 비꼽니다. 그 때문에 산상 수훈대로, 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자기 일생의 새로운 사업이 되었다는 네홀류도프의 결심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귀족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농민들에게 넘겼던 땅을 다시 회수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부활>에서는 화자든 카츄샤든 네홀류도프든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신뢰를 허락하기 힘듭니다.

실제 삶 같은 묘사와 중립적인 시점으로 '전체상'에 접근하려 한 전작들과 달리 <부활>의 화자는 계속 과거의 사건을 소환해 현상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고, 끝없이 흔들리는 네홀류도프 같은 인물을 통해 미래를 짙은 안개 속에 묻어 두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들을 통해 관계망을 불안과 의혹으로 팽팽하게 긴장시킵니다. 나아가 종교와 사법과 형법 기관에서 종사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작품의 시공간에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과 체념과 분노를 계속 불어놓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파편성과 불안정이야말로 톨스토이가 말년에 골몰했던 '달의 저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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